[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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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변씨가 주문진으로 떠났던 이튿날, 봉평에 남아 있던 세 사람은 진부령 황태덕장으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서 안사장의 덕장에서 햇태를 넘겨받아 주문진에서 다시 일행과 합류할 작정이었다.

좁은 운전석에 세 사람이 들어앉았다.

부슬부슬 내리던 가랑비가 긋고 난 뒤 오랜만에 동해안에서만 볼 수 있는 짙푸른 하늘이 높다랗게 떠있었다.

조수석에 철규와 나란하게 자리잡고 않은 승희는 가슴속이 그지없이 편안했다.

그녀는 시선을 줄곧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으로만 떨구고 있었다.

산기슭마다 당돌하게 흐드러진 철쭉들의 군락지가 스칠 때마다 차창은 온통 불꽃으로 물들여졌다.

그녀는 힐끗 철규를 일별했다.

북평장터에서 마주친 이후 그는 대체로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승희가 느닷없이 행중에 끼어든 것이 못마땅한 것이었다.그러나 그의 비위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의 그녀에겐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일생동안 단 한번도 없었던 일, 그것은 바로 이 남자에게 사랑스런 여자로 보이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그와 좁은 조수석에 나란히 앉아 어디로 떠나가고 있다는 것부터가 그녀에겐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느닷없이 찾아와 파출부를 자청한 묵호댁의 거동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 여자의 출현이 어쩌면 봉환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러나 승희는 구태여 헤집고들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출현은 오히려 승희에게 철규와의 동행에 충분한 명분과 계기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따지고 들었다가 행여 철규와 동행하고 있는 지금의 위태로운 구도가 허물어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철규와 변씨의 사이에서 벌어졌던 귓속말에도 애써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철쭉이 어찌나 고운지 뽑아다 팔고 싶네요. 운전중인 태호의 눈에도 아침 햇살을 받아 찢어질 듯 피어난 철쭉들이 탐스러웠던 모양이었다.

태호도 이젠 장사꾼이야. 그렇게 되받으며 철규는 빙긋 웃었다.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그의 표정 하나 하나가 자신의 가슴에선 빛과 그늘로 교차된다는 것은 쓸개 가진 여자에겐 비애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에겐 그것이 비애라는 이지적인 자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덧 철규라는 남자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깨달음이 대견스러울 뿐이었다.

봉환에게 느낄 수 있었던 혼자라는 영락감이 말수도 적은 철규라는 남자 곁에 있으면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분수는 넘보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그녀는 그날에 있었던 다섯 시간의 짧은 여행중 내내 포만감에 젖어있었다.

그리고 다섯 시간 여행의 마감에서 있었던 일은 그녀로 하여금 행중에서 떠날 수 없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지난번에 가져갔던 황태를 순식간에 처분하고 돌아온 한씨네 행중들 장사수완에 안사장은 놀랐다. 그리고 다시 황태 2백쾌를 요구하는 행중의 배포에도 놀랐다.

그 사이에 승희는 안씨집 진미식당 주방에 있었다.

주방에서 황태구이 조리를 구경하고 있던 승희의 뇌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승희는 일행이 덕장에 머물렀던 하룻동안을 내내 식당주방에서 보냈다.

이튿날 오후, 일행은 덕장을 떠나 주문진으로 차를 몰았다.

승희의 뇌리를 스쳤던 것은 바로 냄새였다.

불고기 전문 식당에선 고객이 있든 없든 항상 고기 굽는 냄새가 끊이지 않는다면 어떨까. 당장 고객들이 몰려들지 않더라도 그곳에 불고기집이 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는 있을 것이었다.

백화점 일층에는 화장품 점포들로 들어차 있기 때문에 은연중 그 백화점의 고급스럽고 우아한 분위기를 만들고, 나아가 구매욕을 자극하는 효과까지 노린 상술은 아닐까. 황태난전 곁에서 황태구이 냄새를 풍긴다면, 장꾼들의 구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할 것이었다.

단순한 발상이었지만, 그것이 승희의 생각이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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