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연 소설 '변명'·전경린 '바닷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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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 '넌 나와 함께 있을 때만 살아 있고 그 외엔 어디에도 없는 거야. ' '그래요. 당신이 나를 불러내지 않으면, 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요. 당신은 내 존재의 유일한 거처죠. ' A는 속으로 말한다.

사랑이란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인 거라고. " 신예작가 전경린 (36) 씨는 최근 나온 소설집 '바닷가 마지막 집' (생각의나무刊)에서 사랑은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라고 묻고 있다.

유부남.유부녀에게도 사랑은 윤리.진실 차원의 것이 아니라 살아있음을 뜨겁게 확인하는 존재 차원의 것일까. 해서 '불륜 (不倫)' 이란 말은 이제 우리 문학.사회에서도 필요없는 언어가 되어버렸는가.

전씨의 작품집과 함께 최근 나온 정길연 (37) 씨의 장편 '변명' (전2권.이룸刊) 도 불륜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고 있다.

84년 '문예중앙' 을 통해 등단한 정씨는 작품집 '다시 갈림길에서' 등을 통해 무너져 내리는 가족관계를 주로 다뤄왔다.

이번 장편에서도 정씨는 외도와 이혼을 중년여성의 시각에서 냉정히 살피고 있다.

"같은 식탁에 앉아서 따뜻한 식사를 나누고, 같은 욕실을 같은 수건을 사용하면서, 당신의 정자를 내 자궁에 심어 한 아이를 낳아 기르도록 한결같은 이름으로 불려졌는데, 언제부터 나는 당신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는가?" 주인공이자 작품의 화자인 나는 10여년간 잘 살던 남편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 가 되어 조용히 이혼을 받아들인다.

남편은 다른 여자와의 만남을 그날 그날 곧이곧대로 아내에게 고백한다.

다른 여자와의 새삼 사무치게 절절한 연애의 감정을 중계하듯 아내에게 털어놓는다.

그러면서도 아내에게는 애정어린 시선 한번 보내지 않는다.

아내이면서도 그 불륜을 포기하라는 권리를 못찾고 그 여자에게 남편을 보내고 만다.

오히려 그들의 불륜을 끝까지 옹호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변명' 이 남편의 불륜에 대한 여성적 자세를 파헤쳤다면 전씨의 '바닷가 마지막 집' 은 향수, 혹은 인간의 시원을 찾는 의례 (儀禮) 로서 유부녀의 사랑이 드러나고 있다.

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전씨는 작품집 '염소를 모는 여자' 등을 출간하며 여성, 나아가 인간의 근원적 자유와 사랑을 상징적 문체로 치열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번 작품집에 실린 8편의 작품을 통해서도 몽상적 구성과 눈에 잡힐듯한 강렬한 문체로 중년여성의 권태와 그 출구로서의 용납될 수 없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

"로맨틱의 본질이란 불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 A가 허용되지 않은 것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A와 심연 사이에서 눈처럼 흰 레이스가 처연하게 펄럭이는 것을 보게 되었다. " 단편 '거울이 거울을 볼 때' 한 부분이다.

아이 낳고 서른셋에 이른 여자 A의 권태는 다른 사십세의 남자와 관계를 가지면서 해소된다.

남편과의 익숙하고 편안한 관계는 더이상 여성으로서의 실존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상투화된 삶은 덫이다.

"어쩌면 이 연애의 진실은 그 이물감일 것이다. " A의 말마따나 그 불가능한, 불륜의 사랑은 하나의 '이물감' , 끊임없이 딴 세상을 향하는 결단적 사랑으로서 로맨틱의 본질을 중년에 찾아준다.

거기서 작품들은 끝난다.

"피와 꿈과 순결한 치정의 궤적, 그것이 나의 글쓰기" 라는 전씨의 말대로 작가는 중년의 내적 욕구를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 원초적 자유에의 갈망에는 그러나 윤리나 사회의식이 파고들 틈이 없다는게 우리시대의 문제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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