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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표정만 보고도 결재서류 사인할 줄 알아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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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호 24면

하루 한두 시간 ‘게으른 시간’ 필요
세 사람의 ‘CEO 업력’을 모두 합치면 30년. 김광로 부회장이 12년, 이철우 사장이 11년, 정순원 사장이 7년이다. 경력으로 볼 때 ‘CEO학(學)’이 있다면 일급 교수급이다. 이들에게 먼저 CEO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물었다.

잘나가는 세 CEO가 펴낸 책 펼쳐 보니

김광로 부회장은 조금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한없이 여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김 부회장은 “건강한 리더라면 하루 한두 시간가량 한가한 시간(idle time)이 필요하다”며 “지혜는 고요히 생각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했다.

오전 7시쯤 출근하는 그는 테니스와 신문 읽기로 일과를 시작한다. 오전에 주로 회의를 주재하거나 결재를 한 다음 오후 일정은 거의 잡지 않는다. 대신 집무실 문을 열어놓고 직원들과 대화를 나눈다. 김 부회장은 “CEO의 여유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회사를 더욱 생명력 있게 만드는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정순원 사장은 조금 다른 얘기를 꺼냈다. 현대경제연구원 박사 출신으로 1999년 현대·기아차 기획총괄본부장으로 기업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정 사장은 CEO의 치열한 하루를 ‘아라비안나이트’에 비유했다.

“학자는 현상을 객관화하려고 하지만 CEO는 그렇지 않더군요. 아라비안나이트(천일야화)에서 1000일 동안 하루라도 임금을 즐겁게 하지 못하면 화자(話者)인 세헤라자데가 죽는다고 하잖아요. CEO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물론 공통점도 있다. 김 부회장은 “CEO는 얼굴만 보고도 오케이 결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잘라 말했다. 얼굴 빛, 목소리 톤만 봐도 그 보고서의 충실도를 짐작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정 사장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단다. “베트남에서 수(水)처리 사업을 할 때 관련 회사를 한 곳 인수했습니다. 담당자가 와서 보고하는데 목소리 톤이 좀 이상한 겁니다. 일단 ‘뜨거운 나라에서 고생이 많다’며 돌려보낸 뒤 비밀리에 직원 두 명을 현지에 보냈지요. 아니나 다를까, 적자를 흑자로 분식했더군요.”

이철우 사장은 위기관리 능력과 명쾌한 솔루션을 강조한다. “아무리 일등 기업이라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면 온몸의 안테나를 세워 시장 동향을 주시해야 한다”는 게 그의 CEO론이다. 그래서 이 사장은 “시작은 언제나 3·6·5 프로세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즉 3개월에 걸쳐 6개월 동안 직원을 새롭게 변화시킨다면 5년 안에 혁신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98년 롯데리아 CEO에 취임하면서 이 능력을 발휘했다. 업계 1등이지만 ‘가맹점에 식재를 공급하는 것에 만족하던’ 회사였던 롯데리아를 완전히 바꿔놓은 것. 라이스버거·김치버거 같은 히트상품을 출시하고 매장 분위기를 고급화해 온 가족이 즐기는 공간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롯데리아는 금세 ‘어른 고객’을 사로잡았다.
 
천일야화 주인공 같은 절박함 지녀야
김광로 부회장은 LG전자의 인도 시장 매출을 1조5000억원대까지 끌어 올린 주역. 지난해 영입된 비디오콘에서도 1년 만에 매출을 50% 이상 키웠다. 이철우 사장은 매출 10조원에 이르는 ‘유통 공룡’을 이끌고 있다. 정순원 사장도 2조원대 매출의 국내 최대 도시가스 공급업체를 책임지고 있다. 세 사람 모두 거대 기업의 수장을 맡고 있지만 ‘사소한 문제’처럼 보이는 소통 활성화에 특별히 공을 기울이고 있다.

김 부회장은 신뢰가 사람을 움직인다고 믿는다. 책 제목을 ‘크레도(CREDO·신뢰)’라고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김 부회장이 강조하는 것이 권한 위임이다. “비즈니스 전쟁터에서 적이 나타나면 즉시 쏴야죠. 상사한테 ‘쏠까요, 말까요’ 물어 보면 이미 진 게임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대우자동차 인도법인은 조금 심하게 말해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사인만 기다리던 회사였어요. 김 회장이 인도까지 와서 자동차 값을 결재하고 나서야 신차가 나온 적도 있습니다. CEO가 모두 싸들고 뛰면 기업이 잘되기 힘들어요.”

이철우 사장에게 가장 먼저 소통해야 할 대상은 고객이다. 서비스 업체 CEO다운 답변이지만 현실에서는 쉬운 얘기가 아니다. 최근 부산에서 롯데는 라이벌 신세계와 일대 혈전을 벌이고 있다. 신세계가 지난 3월 센텀시티점을 개장하면서 불과 10여m 옆에 있는 롯데백화점에 일순간 비상이 걸린 것. 그도 그럴 것이 신세계 센텀시티점은 매장 규모가 롯데의 두 배인 데다 아이스링크·온천·골프라운지까지 갖췄다.

그러나 이 사장은 신세계 센텀시티점 개점에 맞춰 ‘신세계 오픈을 축하합니다’는 대형 현수막을 걸어놓고 라이벌 업체의 출현을 환영했다. 그는 “롯데와 신세계를 합쳐 놓으니 동아시아 최대 쇼핑센터가 문을 연 셈”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회사야 피 말리는 경쟁을 해야 하지만 고객 입장에서 보면 훨씬 쇼핑하기가 즐거워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사장은 ‘팔 매(賣)’ 자 매장(賣場)보다 ‘살 매(買)’ 자 매장(買場)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지난 1월 말 세계적인 화장품 브랜드 샤넬이 롯데에서 철수했을 때 ‘샤넬 제품 구입을 원하시는 고객님은 인근 ○○○백화점 ○층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정순원 사장은 “CEO에서 말단까지 의사소통이 잘되는 회사가 좋은 회사”라며 설득력 있는 소통의 공간으로 ‘강당’을 꼽았다. CEO가 정한 목표와 전략을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정확하게 전달하고 공감대를 만들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대목에서 정 사장은 미국 대통령이 근무하는 ‘백악관 같은 회의실’을 만들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백악관 사무실은 대통령 집무실을 중심으로 부채꼴처럼 참모의 방이 모여 있어요. 언제든지 대통령실에서 참모를 부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안일수록 한자리에 모여 토의하는 것이 중요한데 주요 임원은 (백악관처럼) 사무실을 한데 모으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포용력 못지않게 기강도 중요해
그렇다고 이들이 한없는 포용력으로 믿고 맡기는 경영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한 손에 권한 위임이라는 해법을 들고 있다면 다른 손에는 기강과 단호함을 쥐고 있다. 요컨대 유능한 경영자는 ‘양손 경영’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광로 부회장은 비디오콘으로 옮기고 나서 400개가 넘는 영업 사무소를 46개로 줄였다. 악성 재고도 바로 정리했다. 업무능력 하위 10% 인력은 바로 해고했다. LG전자 시절에도 그는 “개인에게도 새로운 자극이 된다”며 ‘10%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정순원 사장은 ‘권한 위임 후 관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위임한 업무가 기대했던 대로 이행되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이를 회수해야 한다는 것. 위임할 때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회사가 자칫 위험해질 수 있어서다. 아울러 정 사장의 구조조정론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 정 사장은 “마른 수건 또 짠다고 득 되는 것이 아니다”고 갈파한다. 경비 20~30% 줄여서 굴러갈 사업이라면 아예 접는 게 낫다는 것이다. 구조적 원가 절감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또 구조조정은 한 번으로 끝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금 안 되면 2차, 3차에 한다는 식이라면 직원의 충성심도 사라질뿐더러 회사의 장기적인 발전도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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