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항쟁은 중산층에서 노동자까지 서로 어깨를 겯고 하나의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90년대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처해있는 입장이 다른 탓에 서로의 갈 길도 달랐던 것이었으리라. 올해를 마지막으로 5월31일 끝난 '자유' 공연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읽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96년 6월 시작돼 그해 9월을 비롯, 총 4회동안 연인원 6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대규모 음악축제 자유. 매회 '사전심의제 철폐' '라이브클럽 합법화' '일본문화 개방에 맞선 대응' 등 문제를 제기했다.
행사 초기에는 마치 69년 '평화와 음악을 위한 3일' 이라는 주제로 미국서 열렸던 '우드스톡 페스티벌' 을 떠올리게 하는 열광적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자유가 관심을 모았던 점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음악인이 한데 어울려 공연을 갖는다는 실험성이었다.
그동안 조용필.신해철.패닉 같은 스타급 가수와 꽃다지.메이데이 등 진보적 음악인, 양희은.한영애.조동진 등 선배 언더그라운드 가수, 그리고 이제 막 자라나는 클럽밴드가 이 공연을 거쳐갔다.
TV가 지배하는 음악계의 획일적인 풍토를 바꾸기 위해 뜻을 같이하자! 하지만 기반이 다른 이들을 한자리에 세우기는 좀 무리였다.
지난해 '97 자유' 에서는 대형무대에서 주류가수들이 공연을 갖는 동안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은 별도로 설치된 '구석무대' 에 서는 등 그 골은 깊어졌다.
'98 자유' 에서도 문제는 이어졌다.
3일동안 고작 8천여명 동원이라는 최악의 성적을 낸 것도 따지고 보면 주류음악의 팬과 언더그라운드 팬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새 때문으로 보인다.
또 이같은 불협화음의 이면에는 흥행성을 고려해야 하는 주최측과 명분을 앞세운 일부 평론가들의 의견 대립도 있었다.
결국 행사를 접으며 주최측은 "제도권이 외치는 '자유' 와 비주류의 '자유' 가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 평가한다.
당초 자유가 제기했던 굵직굵직한 문제들도 고스란히 남은 셈이다.
그렇다고 자유는 완전한 실패작일까. 이 공연을 계기삼아 한국 대중문화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들이 공론화됐고 독립문화권이 신선한 대안세력으로 부각됐다는 가장 중요한 성과가 있지 않은가.
마치 6월항쟁 이후 독재권력을 용납 않는 수많은 '6월세대' 가 탄생한 것처럼 말이다.
문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