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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축제 '자유']미완의 自由…외침은 길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87년 6월항쟁은 중산층에서 노동자까지 서로 어깨를 겯고 하나의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90년대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처해있는 입장이 다른 탓에 서로의 갈 길도 달랐던 것이었으리라. 올해를 마지막으로 5월31일 끝난 '자유' 공연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읽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96년 6월 시작돼 그해 9월을 비롯, 총 4회동안 연인원 6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대규모 음악축제 자유. 매회 '사전심의제 철폐' '라이브클럽 합법화' '일본문화 개방에 맞선 대응' 등 문제를 제기했다.

행사 초기에는 마치 69년 '평화와 음악을 위한 3일' 이라는 주제로 미국서 열렸던 '우드스톡 페스티벌' 을 떠올리게 하는 열광적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자유가 관심을 모았던 점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음악인이 한데 어울려 공연을 갖는다는 실험성이었다.

그동안 조용필.신해철.패닉 같은 스타급 가수와 꽃다지.메이데이 등 진보적 음악인, 양희은.한영애.조동진 등 선배 언더그라운드 가수, 그리고 이제 막 자라나는 클럽밴드가 이 공연을 거쳐갔다.

TV가 지배하는 음악계의 획일적인 풍토를 바꾸기 위해 뜻을 같이하자! 하지만 기반이 다른 이들을 한자리에 세우기는 좀 무리였다.

지난해 '97 자유' 에서는 대형무대에서 주류가수들이 공연을 갖는 동안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은 별도로 설치된 '구석무대' 에 서는 등 그 골은 깊어졌다.

'98 자유' 에서도 문제는 이어졌다.

3일동안 고작 8천여명 동원이라는 최악의 성적을 낸 것도 따지고 보면 주류음악의 팬과 언더그라운드 팬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새 때문으로 보인다.

또 이같은 불협화음의 이면에는 흥행성을 고려해야 하는 주최측과 명분을 앞세운 일부 평론가들의 의견 대립도 있었다.

결국 행사를 접으며 주최측은 "제도권이 외치는 '자유' 와 비주류의 '자유' 가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 평가한다.

당초 자유가 제기했던 굵직굵직한 문제들도 고스란히 남은 셈이다.

그렇다고 자유는 완전한 실패작일까. 이 공연을 계기삼아 한국 대중문화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들이 공론화됐고 독립문화권이 신선한 대안세력으로 부각됐다는 가장 중요한 성과가 있지 않은가.

마치 6월항쟁 이후 독재권력을 용납 않는 수많은 '6월세대' 가 탄생한 것처럼 말이다.

문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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