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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하구나 … 서양 따라가느라 헉헉대는 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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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무대엔 불상(佛像)이 있었다. 얼추 세어 보아도 10개는 족히 돼 보였다. 반듯하게 고이 모셔도 시원치 않을 불상이건만 내팽개처지듯 널부러져 있다. 그 사이로 등장하는 건 무용수들이다. 그들은 불상 앞에서 춤을 추다 느닷없이 불상을 껴안기도 하고 머리에 이기도 한다. 심지어 불상 모양의 탈을 쓰고 나와 우스꽝스런 동작을 취하기까지 한다. 이토록 유희적으로 표현해도 되는 것인가.

부처상 옆에 앉은 그가 집어삼킬 듯 포효한다. 권위에 대한 저항을 의미할까. 막상 공연중엔 없는 장면을 연출한 사진이며, 무용수는 안지석씨다. [LG아트센터 제공]


◆무용, 불교를 갖고 놀다=‘안애순 무용단’의 신작 ‘불쌍’은 이처럼 논란이 될 만한 낯선 장면으로 극을 연다. 그렇다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길. 종교에 대한 도전, 혹은 불교에 딴지를 걸려는 불온한(?) 의도를 담은 건 전혀 아니다. 작품의 모티브는 해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부다 바(Buddha Bar)’다. 부다 바는 종교적 아이콘인 불상이 팝아트 조각상으로 변형돼 인테리어나 가구로 사용되고 있는 고급 레스토랑 이름이다. 1996년 프랑스 파리에서 문을 연 뒤 전세계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불상으로 상징되는 동양 문화가 서양인들에겐 막상 어떤 식으로 소비되는지를 짐작케 해 주는 공간이다.

부다 바는 역수입돼 국내로 들어왔다. “웃기지 않나요. 원형은 한국에 있는데, 해외에선 이에 대한 정신은 날려버리고 형체만으로 포장을 하고. 근데 그 재해석이 앞선 트렌드라며 수입을 하는 세태 말이에요.” 안무가 안애순씨의 말이다. “변형된 우리 것을 거꾸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불쌍’해 제목도 그렇게 지었다”고 덧붙였다.

◆변종을 말하되 원형으로 돌아가다=작품은 딱히 날선 비판 의식이 강조되는 건 아니다. 원형에 대한 물음, 또한 변종과 혼용으로 점철된 현 세태를 차분히 응시한다. 음악은 국내 힙합 DJ계의 거물로 평가받고 있는 DJ 소울스케이프(본명 박민준·30)의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축을 이루면서 게임기 효과음이 불협화음처럼 간간히 등장한다. 무대에 보여지는 불상은 설치미술가 최정화(48)씨의 작품이다. 대형 스크린엔 존 레논과 마돈나 등 현대 대중문화 아이콘들이 등장해 객석의 눈을 확 끌어당긴다.

융합은 춤도 마찬가지다. 인도의 카탁, 한국의 입춤과 진도 북춤, 중국의 전통무예, 몽골의 민속 무용 등이 다양하게 펼쳐진다. 몸을 비비 꼬고 고개를 휙휙 돌리는 장면 등은 춤이라기보단 묘기에 가까울 정도다.

그래도 결국 남는 건 몸뚱아리다. 일찍이 한국 현대 무용의 세계화를 모토로 했던 안애순씨는 이번 작품에서도 보편적 소재를 활용하되 발끝을 세우기 보단 발등을 지려밟고, 깊은 호흡으로 우려내며, 느린 듯 유연한 몸놀림으로 한국적 춤사위를 마음껏 뽐낸다. 이질적 요소가 뒤범벅된 작품이지만 뛰어난 기량의 무용수들은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그건 마치 변종을 얘기하면서도 결국은 ‘원형이 단단해야 한다’는 은유 같다. 안씨는 “숨가쁘게 변하는 문화를 따라가느라 헉헉대는 내 모습, 그리고 우리 모습을 담고 싶었다”고 말한다.

최민우 기자

◆안애순 무용단의 ‘불쌍’=25·26일 오후 8시 서울 LG아트센터, 3만∼5만원, 02-2005-0114 

◆안무가 안애순=1960년생으로 이화여대 무용과를 나왔다. 98년 프랑스 바뇰레 안무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현대 무용의 틀 안에 한국의 전통적 춤사위를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접목시킨 점이 높이 평가돼 왔다. 최근엔 ‘대장금’ ‘바람의 나라’ 등 뮤지컬 안무가로도 활발히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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