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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산하 우리풍물]20.흑산도 홍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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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서해로 떨어지는 태양에 바다는 온통 붉은빛으로 넘실댄다. 만선의 깃발을 나부끼는 홍어잡이 어선도 빨갛게 불탄다.

꽹과리.나팔소리가 자그마한 포구를 뒤엎고 그 사이로 주민들의 남도소리가 세마치 장단에 맞춰 끊어질듯 이어진다. '홍어가 돌아왔다. ' 옛부터 교통이 불편한 산간오지에서 한여름철에도 먹을 수 있었기에 잔치음식의 왕좌를 지켰던 그 홍어가 흑산도 근해에서 다시 잡히고 있다.

적당히 삭힌 고기 한점을 김치에 싸서 먹는 홍어는 남도 최고의 술안주감으로 손꼽힌다. 입안을 톡 쏘는 알싸한 맛과 눈물이 핑 돌 정도의 역한 냄새. 듣기만 해도 미간을 찌푸리게 하지만 옛 향수를 물씬 풍기게 한다.

"예년같으면 벌써 주낙을 걷어올린지 오래됐지라. 그러나 올해는 지난해보다 많이 잡혀 아직도 홍어잡이에 나서고 있당께. " 청신호 (10톤) 는 흑산도에 마지막 남은 홍어잡이 어선. 흑산도 홍어의 명맥을 지키고 있는 선주 김광식 (50.전남신안군흑산면홍도2구) 씨의 주름진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홍어잡이는 원래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출어한다.

그러나 올해는 홍어가 뒤늦게 흑산도연해에서 잡히면서 5월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선이 30여척에 달했던 80년대까지도 홍어잡이는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저인망어선으로 치어까지 훑어가는데다 우리 영해를 침범한 중국어선들의 불법어로 때문에 채산성이 나빠지자 모두 떠나 이제는 청신호만이 옛 명성을 지키고 있다. "지도 지난해 홍어잡이를 끝낼려고 했지라. 그러나 신안군청에서 '홍어잡이배의 명맥이 끊긴다면 안된다' 면서 2천2백50만원을 지원해줘 다시 시작했는디 올해 제법 잡혀 적자는 면했지라. " 홍어를 잡는 주낙 (어구) 값은 1개에 4만5천원 정도다.

한번 출어하는데 어구를 1천개이상 바다에 뿌리고 5일 뒤 걷는다.

중국어선들이 주로 노리는 대하.전어.황사리등은 홍어의 좋은 먹이감. 그러다 보니 우리 어선과 조업장소가 겹친다. 그래서 중국어선들의 횡포가 이만저만 아니다.

"중국아들이 한번 훑고 지나가면 어구손실만 수천만원에 달하지라. 이렇게 당한 사람들이 한두명이 아니랑께.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 어민들에게는 중국어선들의 불법어로가 심각한 문제인기라. " 4년전 어구를 몽땅 털리고 3대째 이어오던 홍어잡이 일을 손뗀 후 유람선을 운영한다는 이상수 (34) 씨의 울분에 찬 이야기다. 홍어는 가을이 되면 황해에서 내려와 흑산도연해에서 겨울을 난다.

이때가 홍어의 산란기로 살이 실하고 껍질도 얇아 최상품으로 꼽는다. 그러나 값이 마리당 30만원을 호가해 목포등지에서 '××홍어집' 이라고 간판을 내건 식당에서는 대부분 외국산이나 가오리를 사용한다.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후 조황을 알아보려고 김씨에게 다시 연락했다. 그러나 지난 23일 어구를 걷으러 나간 청신호는 낚시줄을 끊어버리고 도망간 중국어선들 때문에 빈배로 돌아왔다.

피해만 2천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앞날이 막막하기만 한당께. 이처럼 우리 어민들이 당하고 있는데도 해경은 도대체 뭘 하는지…. " 김씨의 탄식소리만 수화기를 가득 메웠다.

글.사진 = 김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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