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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인터뷰]서울교구장 30년 김수환 추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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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만난사람 이은윤 본사 종교전문위원] 서울 명례방 뾰족집 (명동성당) 이 29일로 1백세 생일을 맞는다. 대지라는 세속에 기초를 파고 지은 이 교회 지붕 위로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뾰족한 종탑이 치솟아 있다. 이처럼 명동성당은 한국인의 현실과 이상을 아우르면서 한세기 동안 모진 현대사의 풍랑을 같이 겪어 왔다. 때로는 민권운동의 구심으로, 반독재투쟁의 장 (場) 으로 민족의 고통에 동참했다.

한국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를 30년동안 지켜온 김수환 (金壽煥) 추기경 (스테파노) 이 명동성당 1백년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교회는 물론 세속 사회 차원에서도 자못 심대했다. 명동성당 축성 1백년과 김추기경 서울교구장 착좌 30년을 되돌아본다.

- 서울대교구 교구장 30년동안 가장 보람을 느꼈던 일과 가장 힘들었던 일을 회고해 보신다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을 모셨던 천주교 전래 2백년 행사 (84년) 와 세계성체대회 (89년) 를 가장 기뻤던 일로 꼽고 싶어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계기도 되었고 한국교회를 세계교회에 널리 알릴 수 있었으니까요. 또 한가지는 87년 6.10 민주항쟁때 당국이 강제해산하려던 시위대를 사제들이 버스에 태우고 안전하게 귀가시켰던 일입니다.

그리고 지학순주교가 양심선언을 하고 당국에 잡혀갔을 때는 정말로 참담했습니다.

그럴 때는 강론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뇌도 많이 했고 대치상황이 빨리 끝나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지요. "

- 서울교구 사목 30년동안 제사장적 사명에 입각한 개인의 영적구원과 예언자적 사명의 사회구원 중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을 두셨습니까.

"사회참여를 완전히 배제하는 사제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와 사회가 유리되지 않습니까. 저는 영적구원과 사회구원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인 우리 모두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사랑을 나누는 사회를 가꾸어야 합니다.

이런 가치관을 바탕으로 세계화가 이뤄져야 하는데 지금의 세계화는 경제적 세계화에 지나지 않아요. 그래서 경쟁과 알력을 부르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체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라는 공동체의식이 새삼 절실히 요구되는 가치입니다. "

- 명동성당은 종교적 성역일 뿐 아니라 민주화운동의 메카이기도 했습니다. 추기경의 서울교구장 착좌 30주년이 되는날은 명동성당 축성 1백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명동성당 축성 1백주년의 감회는 어떤지요.

"숫자적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한제국 말기, 일제침략, 한국전쟁, 4.19학생의거, 5.16군사혁명, 5.18광주민주화항쟁 등 지난 1백년의 암담한 역사를 되돌아볼 때 그런 어둠을 밝혀주는 빛과 이 세상의 소금 역할을 해냈다면 자화자찬일까요. "

- 명동성당은 '성역' 의 이미지와 함께 민권운동의 본산으로도 높이 평가받습니다.

요즘 IMF사태와 실직자문제 등 중요한 사회문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 (對) 사회 발언이 뜸한 것 같은데….

"지난 성탄절 메시지에서도 이기주의를 버리고 이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자고 호소했어요. (추기경은 이 대목에서 "인쇄물을 보여 드릴까요" 라며 크게 웃었다. ) 그런데 이제는 그런 말들이 전처럼 먹혀들질 않더군요. 옛날에는 하고픈 말들이 강압에 눌려 모두가 침묵했습니다. 그런 때는 작은 말도 크게 전파되었는데 요즘은 모두가 말을 하니까 잘 들리지 않을 뿐입니다. "

- 가톨릭 노동사목이 제시하는 노동윤리는 어떤 것입니까.

"존엄한 인간이 자신의 생존과 성장발전을 위해, 더 나아가서 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존엄하고 신성한 행위가 바로 노동입니다.

노동이란 신성할 뿐 아니라 개개인의 인격완성에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노동에는 충분한 보상도 따라야겠지요. 노동자와 사용자는 서로의 상호의존 관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협조하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싶습니다. "

- IMF체제가 된 후 사회 분위기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등으로 아주 우울합니다.

"자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정리해고를 통해 기업을 먼저 살린 뒤 일자리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이런 점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업도 정리해고 등으로 실업자와 사회가 겪게 되는 고통을 충분히 감안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물러나는 사람들은 IMF체제에 따른 고통을 나라의 장래를 위한 불가피한 고통으로 이해해야겠지요. "

- 평양교구장으로 곧 북한을 방문하실 것으로 아는데 북한동포들에게 내놓을 선물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아직 구체적인 일정은 잡히질 않았어요. 늘 준비해온 선물입니다만 마음!바로 그것 아닙니까. (웃음) 마음만 주면 가진 것 다 주는 거지요. "

- 세속적인 질문이라서 뭣합니다만 새 정부의 개혁정책에 대한 견해는 어떻습니까.

"전문지식이 없어 구체적으로는 말하기 곤란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합니다. "

- 새 정부 개혁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경제를 살리는 게 당면과제 아닙니까. 한가지 바라는 것은 이번 지방선거를 깨끗이 치름으로써 정치풍토를 일신하고 청렴한 공직사회를 이뤄 정부가 국민의 신뢰도를 확보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국력입니다. "

- 정치민주화는 어느 정도 진전되었다고들 합니다만 지방선거를 앞두고 전개되는 행태를 보면 지역할거주의가 전혀 수그러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고질병인 지역감정을 해결할 묘안은 없을까요.

"5.16 전까지만 해도 대구에서 전라도광양 출신인 조재천씨가 국회의원에 당선되곤 했던 기억이 새롭군요. 과도기적 처방으로 내놓는다면 현정부가 지역편중 인사를 약간은 해도 될 것 같아요. 밸런스를 맞추는 차원에서 조금 더 시원하게 (웃음) 해도 괜찮다고 봐요. 그러다 보면 인사문제 등으로 빚어진 지역갈등이 치유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혼자서는 별의별 생각을 다 해봅니다. 농담이지만 본관 (本貫)에 따라서 저처럼 광산 (광주) 김씨는 모두 전라도출신으로 분류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지도자부터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망국으로 간다는 인식을 갖고 그러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

- 21세기 이후를 종교의 세기, 철학의 세기 같은 '정신문명의 시대' 로 예견하는 석학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종교의 역할에도 변화가 예상되는데….

"컴퓨터에 빠지는 아이들을 보면 이웃과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결과는 인간소외를 부를 가능성이 큽니다. 인간소외를 벗어나기 위해 사랑을, 진리를, 삶의 의미를 갈구한다면 종교의 세기, 철학의 세기라는 표현도 틀리지는 않겠군요. (웃으면서) 그러면 저희들이 할 일이 너무 많아지는데…"

- IMF사태 전에는 '아시아적 가치' 가 주목을 끌기도 했지요. 그래서 그런지 다음 교황은 남미나 아시아.아프리카에서 나올 수도 있다는 전망들을 하는데 추기경께서도 물망에 오르시지 않는지. " (웃음) 세상 사람들의 정신상태가 모두 약간 이상해지면 물망에 오를지도 모르죠. 교황은 판단력도 뛰어나고 외국어 실력도 대단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말도 잘 못하고 영어도 시원치 못해요. 이번 아시아주교회의에서 보니까 교황을 할 만한 추기경이 아시아에도 있긴 하더군요. "

- 한때 로마가톨릭에 진보신학 노선이 부상했었는데 지금의 교황은 정통주의 신학노선입니다.

21세기를 앞두고 로마가톨릭의 노선에 어떤 변화가 보이는가요.

"바오로2세 교황을 두고 보수적이라고 평가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닙니다. 사제독신제나 여성사제에 대해서는 강력히 반대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는 이해가 무척 깊어요. 바오로2세는 '가난한 자들의 우선적 선택을 추구하는 것이 성령에 순종하는 것' 이라거나 '인간을 해방시켜 주지 못하는 신학은 신학이 아니다' 라고 강조하십니다. "

- 추기경의 정년문제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가 없군요.

"사표를 1년전에 제출했는데 아직 후임자 선정작업 등의 공식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사실은 사표수리를 하루가 삼추같이 기다리고 있어요. "

- 서울대교구 교구장 은퇴 후에 하시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운전면허를 따고 싶어요. 정말로 다니고 싶은 곳이 많은데…. 운전면허를 취득한 후에는 봉사활동을 하고,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젊은이들에게 신앙을 깊이 심어주고 싶군요. "

- 지금 승용차는 어떤 것입니까.

"쏘나타입니다. 그 전의 스텔라보다 고급이지요. "

- 비행기도 여전히 3등석을 타십니까.

"마일리지가 높아서 그런지 항공사에서 자주 1등석으로 업그레이드 해줍니다. "

- 좀 야속한 질문이지만 교회의 물량주의.팽창주의도 IMF를 불러들이는데 일조하지 않았을까요.

"위에서 아래까지 다 방만하게 살아온 결과인데 종교라고 예외가 될 수 있겠어요. (추기경 집무실 내부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 방도 조금 넓어졌는데 그 증거가 아닐까요. (웃음) 교회도 이제 보다 청빈과 사랑.정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실천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

- 골프는 안 배우셨습니까.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외국을 다니다보면 억지로 끌려갈 때가 있습니다. 열번 휘두르면 공을 맞히는 경우는 한번 있을까 말까고 다 땅을 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왜 골프를 좋아하는지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더군요. "

- 지금 국민들의 위기감은 대단합니다.

모든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국민들에게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미국 골프계와 야구계에서 맹활약중인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세요. 박세리.박지은.박찬호는 '하면 된다' 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IMF한파는 고통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통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도 아울러 주고 있어요. 이런 과정을 겪어야 세계화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 축적됩니다. 발길에 밟혀도 거듭 일어나는 잔디처럼, 이 기회에 새로운 발전을 향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야 합니다."

- 훌륭하신 말씀 감사합니다.

정리 =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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