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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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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영어 울렁증’으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큰 위로가 된다. 복수 명사 뒤에 3인칭 단수 동사 ‘is’를 예사로 갖다 붙이는 모습을 보면 ‘예일대 학사-하버드대 석사’란 학벌이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문법뿐 아니라 어휘 실력도 기대 이하였다. Greeks(그리스인)를 버젓이 ‘Grecians’라 부르더니만, underestimate(깔보다)를 헷갈려 ‘misunderestimate’라 하는 바람에 두고두고 놀림감이 됐다.

미국 대통령조차 애를 먹일 만큼 영어의 어휘는 방대하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공식 게재된 단어만 60만 개다. 프랑스어(10만 개)나 스페인어(25만 개)는 비교도 안 된다. 다른 언어와 문화를 스펀지처럼 흡수해 몸집을 불려온 결과다. ‘영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프리 초서는 빈약하기 짝이 없던 영어를 풍성하게 만든 선구자로 꼽힌다. 14세기 당시 영어에 없던 말을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에서 슬쩍 빌려왔다. secret(비밀)·policy(정책)·galaxy(은하) 등 그렇게 만든 신조어가 1000개도 넘는다.

요즘은 98분에 한 개씩 새 단어가 나온다고 한다. 특수 소프트웨어로 신조어 동향을 파악해온 ‘글로벌 랭귀지 모니터(GLM)’란 단체는 급기야 10일 100만 번째 영어 단어가 탄생했다고 발표했다. 차세대 인터넷을 뜻하는 Web(웹) 2.0이다. sexting(야한 문자·e-메일 보내기)이나 noob(신참) 등이 간발의 차이로 영예를 놓쳤다. ‘여러 나라에서 같은 뜻으로 자주 사용되는 말’을 선정 기준으로 삼았단다.

중국(3억 명)과 인도(3억5000만 명)를 포함해 전 세계 15억 명 이상이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걸 고려하면 당연한 조건이다. 라틴어와 프랑스어가 그랬듯 영어는 이제 영미권만의 언어가 아닌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세계어)이니 말이다.

영어의 득세엔 그늘도 따른다. 영어의 확산으로 각국의 토착 언어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는 게 데이비드 크리스털 교수(영국 방고르대) 등 언어학자들의 지적이다. 2100년쯤이면 현존하는 7000개 언어가 수백 개로 줄어들 거란 암울한 예측도 있다. 영어 공부 열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국도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다. 한류 덕에 한국어를 쓰는 해외 인구가 늘고 있는 게 그나마 희망이라 해야 할까.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