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하르토 하야하던날 현지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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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믿어지지 않는다. 대통령은 수하르토뿐인 줄만 알았는데. 앞으로는 다 잘될 것 같다. " 자카르타시 치레봉가 (街) 버스정류장에서 노점상을 하고 있는 리디 (24.여) 는 담담하게 기쁨을 표현했다.

30여년간 장기집권했던 독재자가 물러났으니 춤도 추고 껑충껑충 뛰기라도 할 것이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자카르타 시내는 평소 그대로였다. 환호하는 군중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수부로토가 (街) 글렌 멜리야 호텔 로비에서 만난 인도만 (41.식료품업) 은 "새 대통령이 재야인사들과 잘 협의해 무리없이 정국을 이끌어가기를 빈다" 고 매우 의례적으로 말했다. 인도네시아 수출입은행격인 방크 엑심 (EXIM)에 근무하는 에코 보트위크 (32) 도 "알라신의 뜻이다.

수하르토는 그동안 많은 일을 했다.

이제는 신이 그에게서 사명을 거두신 것" 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사히드 자야 호텔의 부투 지배인은 "수하르토의 사임은 국민과 국가는 물론 그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물러난 것은 다행" 이라고 평가했다. 현지 한국인 사업가들은 조심스럽게 반기는 모습을 보였다.

소요가 극심했던 당그랑 지역에서 나이키 신발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송창근 (宋昌根.41) 씨는 "1인 장기집권으로 여러 면에서 많이 뒤처진 게 사실이다.

사임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하비비가 수하르토의 복사판이 될 경우 다시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고 말했다.

반면 학생들의 반응은 매우 격정적이다. 21일 의회안에서 만난 마루쿠부아나 대학의 이맘 (22) 은 "너무 기쁘다.

드디어 꿈이 이뤄졌다" 고 외쳤다. 인도네시아대 국문과 멩기야 (21.여) 는 "오늘처럼 기분 좋은 날은 없었다.

너무 즐겁다.

이제부터 시작" 이라고 당차게 말했다. 의회에 모인 학생들은 이날 오전9시 (한국시간 오전11시) 수하르토의 사임발표가 터져나오자 환호성을 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학생들은 서로 껴안고 볼을 비비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일부는 의사당 주변에 서 있는 군인들과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의사당을 경비중이던 에디라는 사병은 "수하르토의 사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고 묻자 빙긋 웃기만 했다. 기뻐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재야세력의 반응은 다소 신중하다.

3천5백만 이슬람세력의 모임 나흐다툴 울라마 (NU) 의 아마드 바그자는 이날 현지 언론과의 회견에서 "조그만 소망이 이뤄졌다. 그러나 알라신은 우리에게 이 나라의 진정한 행복과 번영이라는 더 큰 사명을 남겨주셨다" 고 말했다.

자카르타 이외 수라바야.족자카르타.반둥 등 다른 주요 도시도 비교적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다. 32년간 통치해온 대통령이 물러난데 대한 반응치고는 지나치게 밋밋하게조차 느껴졌다.

이런 반응이 만일 '모든 것은 알라신의 뜻대로' 라는 이슬람 교리에 젖은 국민성에서 나온 것이라면 수하르토의 30여년 장기집권도 바로 이점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카르타=진세근 특파원〈sk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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