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백경]11.현실과 향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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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마침 비오는 날이어서 뒷산이 칩칩했다. 그 산은, 더욱 향수 어리게 초가집을 찍어가라는 듯이 골짜기마다 비안개를 자욱하게 피워 올렸다.

먼발치에서 바라다보기에 그 초가집은 거의 온전해 보였다. 아직까지도 이렇게 멀쩡한 초가집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바로 그 앞에서 바라보면서도 믿기 어려웠다.

전라남도 영광군 묘량면 삼효리의 효동마을에서였다. 지난 60년대 후반께부터 70년대 중반께까지 나는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면서 꽤많은 초가집을 찍었다.

저 으시시했던 새마을운동 때, 먼저 큰 길에서 보이는 초가집들부터 지붕이 벗겨지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갈아 입혀지다가 마침내는 온 나라의 거의 모든 초가집들이 슬레이트집으로 둔갑할 때었다."소비가 미덕이 되는 시대" 를 만들겠다던 박정희에겐 초가집은 한낱 한스러운 가난의 상징, 아니 가난 그 자체로만 보였었던 것 같다.

지붕만 간다고 해서 가난이 물러 가지 않는다는 것쯤은 스스로도 잘 알았겠지만, 그이는 초가집을 증오했다.

가난하지만 푸근해 보였던, 뒷산등성이를 닮은 두툼한 초가지붕의 부드러운 선은 납작한 직선으로 그리고 자연 그대로였던 지붕 색은 붉고 푸른 페인트색으로 요란해졌다. 그것은 오랜 농경문화와 결별하는 독재자의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꾸로였다. 산업화가 잘 되면 저절로 없어질 것을 먼저 증오했다. 그리하여 조상 대대로부터 이어져 오던 이 땅의 풍경이 싹 바뀌고 말았다.

그 뒤로 이십 몇 년이 흘렀다. 그동안도 이곳 저곳의 시골에서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그러나 병들고 지친 초가집을 가끔씩은 만났었다.

반가워서 기웃거리며 사진을 찍다가 거친 욕설에 무안해진 적도 더러 있다.

지금까지도 초가집을 지킨다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을 만난 적은, 섭섭하지만 한번도 없었다. 거개는 가난한 사람들이어서 심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는 수도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어쩌다 만나는 초가집을 찍으려면 바짝 긴장을 해야 했었다. 바로 지난주에 영광군의 여기저기에서 뜻밖에도 여러 채의 초가집을 만났다 여느 지방의 쇠잔한 초가집에 견주면 다 정갈했고 전성기 때의 안온함을 용케도 지니고 있었다.

삼효리의 효동 마을엔 초가집이 무려 다섯 가구에 아홉 채나 있었다. 아마도 민속촌이나 전통가옥 보존마을말고는 가장 많은 곳일 것이다.

민속촌에 채집이 되어 가거나 무슨 지정 (민속자료나 문화재 같은) 을 받으면 그때부터 원형을 알아 보기 힘들 것으로 변형이 된다. 복원이나 보존이라는 이름으로 망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효동 마을엔 전통의 흐름이 있고, 생활 속의 초가집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효동 마을 들목엔 거대한 고인돌들이 선사시대 때부터 자리잡고 있다. 그 고인돌 사이로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나 있다.

영광을 비롯한 남도의 여기저기에는 고인돌이 많이 남아 있다. 구릉 위에 점잖게 버티고 있는 장대한 것도 더러 있으나 대개는 논이나 밭 가운데 누워있다.

그 마을 근처에도 고인돌이 많았다. 효동 마을의 정씨 노인의 초가집은 그 주춧돌들이 커다란 고인돌인 것으로 보였다. 옮겨다가 주춧돌로 삼은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둔 채로 그 위에 집을 지은 것이었다.

몇 천 년 시간이 흘렀건만 사람들은 그리 멀리 가지 못한 듯하다. 기껏 무덤 자리가 집터로 되었을 뿐 그 근처에서 얼쩡거리기는 마찬가지다.

몇 달 전부터 그 집은 빈 집으로 있다. 혼자가 된 팔순 노인이 광주의 아들집으로 간 뒤로부터 그 집은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

만약 그대로 둔다면 머지않아 그 고인돌들은 다시 제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마을 남쪽 산자락께의 김인숙 (76) 노인의 집은 울도 담도 그러므로 대문도 없는 그야말로 초가삼간이었다 (게재된 사진이 김씨 노인과 이 집이다) .집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고 반듯한 것이 이 집주인의 성미를 짐작케 했다. 김씨 노인은 "어떤 날은 밖이 부산해서 내다보면, 사진 찍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겁나게 찍어간다" 고 하면서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선선히 찍어 가라고 했다.

그러다 방에서 뜻밖에도 초상화를 들고 나와서 그것도 찍어 가라고 했다. 그 그림은 놀랍게도, 그 이가 스물 다섯 살 때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린 그 이의 초상화였다.

그러므로 두 얼굴 사이에는 쉰 한해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옛날의 도민증을 며느리가 가지고 가서 해 온 것이라며, "애기 (며느리)가 착하고 무던하지요" 하며 한꺼번에 두 가지 자랑을 했다.

부산에서 공무원을 하고 있는 아들이 함께 살자고 여러 번 조르고 설득했으나 김씨 노인은 완강하게 버티며 혼자 살고 있다. 김씨 노인은 손을 설레 설레 흔들며 말했다.

"십오층 아파트에 사는디요. 거기서 내려다 보니 정신인 나가뿌러…. 길 잃어버릴까 봐 겁나서 혼자서는 오도 가도 못하고…. 그런디시 어떻게 산다요?" 그 이는 이 초가집에서 마흔세 해째를 살고 있다. 현실과 향수 사이는, 적어도 초가집을 매개로 해서는 편도의 다리 밖에 놓을 수 없다.

멀리서 바라만 보는 사람은 향수를 느끼지만, 거기 사는 사람에겐 아무리 그럴싸해도 곤고한 현실일 뿐이다. 설핏해 졌을 때, 이윽고 비가 그치자 산은 더 칩칩해졌다.

글·사진=강운구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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