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수하르토 역할은 끝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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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수하르토의 정치생명은 이제 산소 마스크를 끼고 하루 하루 생명을 이어가는 중환자 같다. 그가 노회한 술수 (術手) 로 대통령자리에 몇 달 더 머무른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다.

달라지는 게 있다면 인도네시아 경제가 그만큼 더 결딴나는 것 뿐이다. 참으로 불행한 것은 수하르토의 개발독재가 무너지면서 그가 32년동안 키워놓은 인도네시아 경제까지 함께 침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하르토는 여섯명의 아들.딸과 측근들이 권력을 이용해 쌓은 부 (富) 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국제통화기금 (IMF) 과 합의한 경제개혁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무한한 권력욕은 지난 3월 그를 일곱번째로 대통령자리에 다시 앉혔다.

그때 비극의 씨는 뿌려졌다. 그가 만약 지난해 10월부터 국민의 이해를 구하면서 경제를 개혁했더라면 나라경제는 일단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섯명의 '현철이들' 이 끌어모은 최소 수십억달러, 최고 1백수십억달러로 알려진 거부 (巨富) 를 포기할 수 없어 결과적으로 멸공봉사 (滅公奉私) 하는 불명예스러운 지도자로 역사의 심판대에 오른 것이다. 경제개혁으로 막을 수 있는 사태를 정치개혁을 하고도 자신은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처지를 자초했다.

이슬람 세력과 학생들은 대강 3개월의 시간을 두고 총선거를 실시하고 헌법을 바꾸어 대통령을 새로 뽑은 뒤 자신은 물러나겠다는 수하르토의 담화에 불신으로 응수하고 있다. 정치개혁을 하라고 압박하는 시위가 전국을 휩쓸 참이다.

서방선진8개국 (G8) 수뇌들도 15일 영국 버밍엄에서 인도네시아는 사회적 안정과 정치안정을 위해 국민과의 대화를 통한 정치개혁을 단행하라고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수하르토는 안팎으로 협공당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딜레마는 심각하다. IMF와 합의한 개혁없이 경제를 살릴 수 없다.

그러나 지금부터 이 나라가 권력의 공백기를 맞으면 앞으로 상당기간 개혁의 주체는 고사하고 정치적.사회적 안정의 주체도 없는 사태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이 나라를 기다리는 것은 거친 파도 속의 바다를 선장없이 항해하는 선박과 같은 운명이다.

IMF도 인도네시아의 현실에 맞지 않는 처방으로 결과적으로 개혁에 실패하고 정권까지 무너뜨렸다는 거센 비판을 받는 입장이어서 혼란스러운 정치적 과도기에 개혁을 적극 촉구할 입장이 아니다. 어느 세력이 권력을 잡아도 이제는 경제개혁과 정치적 민주화를 동시에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개혁의 초기단계에서 높은 인플레와 실업률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정당은 난립하고 1960년 4.19 직후의 한국에서와 같이 이번에는 학생들의 '간섭' 이 정치발전을 저해할 수도 있다.

이렇게 도전은 산적해 있는 가운데 경제는 모라토리엄 단계를 지나 1965년 수하르토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을 당시로 후퇴할 가능성을 경고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러나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실현가능한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해 국민의 신뢰를 얻으면 미국이 주도하는 G8국가들과 IMF가 개혁지원의 조건을 완화해 주는 길을 모색할 것이다. 수하르토의 퇴진과 새로운 지도체제의 등장은 미국에는 호기 (好機) 다.

21세기 동아시아 질서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미국의 아시아외교에 수하르토는 비협조적이었다.수하르토 이후의 인도네시아 지도자는 미국으로부터 경제개혁의 지원을 받는 대신 미국의 21세기 동아시아 외교에 협조를 약속해 미국.인도네시아 관계의 새 시대를 열면 위기해결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미국은 지난 30년동안 인도네시아를 일본의 독무대로 내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체제하에서는 경제적인 실속을 더 챙길 것이다.

인도네시아를 '우군' (友軍) 으로 만들면 리콴유 (李光耀) 와 마하티르 다스리기가 훨씬 쉬워진다는 큰 보너스도 기대된다. 지난 2월 자카르타에서 만난 자카르타 포스트 주필 수산토 푸드조마르토노는 수하르토가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아시아에서 경제개발 성공에서 정통성을 찾던 개발독재는 막을 내리고 있다. 개발독재로 국민의 80%이던 절대빈곤층을 20%로 줄이는 업적을 남긴 수하르토는 자신의 역 (役) 이 끝난 뒤에 무대를 내려오지 않는 배우 같다.

수하르토는 지도자의 수명은 하늘의 뜻인 와유 (Wahyu.天心)가 정한다는 자바 왕국의 전통을 장기집권의 무기로 삼았다. 와유의 전통에 따르면 국왕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후계자를 임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하르토는 자의적 (恣意的) 으로 해석한 와유에 매달려 민심 (民心) 이 와유를 결정하는 현대정치의 현실을 외면했다.

리콴유 한 사람을 남겨놓고 수하르토를 마지막으로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건 우연이 아니다.

세기말에 동아시아를 급습한 금융위기는 이 지역 리더십의 유형과 함께 모든 기존의 가치를 창조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수하르토 퇴진을 요구하는 인도네시아 풀뿌리들이 수행하고 있는 거사 (巨事) 의 메시지를 긴 역사의 문맥 속에서 읽어야 한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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