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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 현실이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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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가상 현실은 최첨단 자동차·휴대전화 디자인을 효율적으로 창조할 수 있게 하고 공장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역할도 한다.

국내 가상현실 연구 1번지인 대전 대덕연구단지 내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가상현실 연구실. 9일 이곳을 찾았다. 그곳에선 연구원들이 컴퓨터가 만든 그래픽 속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현실’을 캐내고 있었다. 150㎡ 남짓한 연구실. 손욱호 박사가 안내했다.

“자, 새로 설계한 승용차의 디자인이 얼마나 좋은지 한번 볼까요.”


그러자 지름 3m 크기의 농구공을 반으로 자른 듯한 반구 형태의 화면에 붉은 색 승용차가 나타났다. 화면 뒤쪽의 디지털 영사기 16대가 쏘는 그래픽이다. 입체 안경을 쓴 기자의 눈에는 영락없는 실물 승용차였다<큰 사진>.

반구형 화면 안쪽에서 그래픽을 봐도 화면이 휘어져 보이지 않았다. 이런 화면과 그래픽 기술은 이 연구실만의 독창적인 기술이라고 손 박사는 말했다. 승용차의 디자인은 무척 아름다웠고 색상도 선명했다. 햇빛이 비칠 때의 그림자와 색상의 변화까지 나타났다.

승용차 안으로 들어가 공중에 투사되는 핸들을 돌려봤다. 그런데 실제 운전할 때와 같은 무게감이 전해졌다. 대시보드의 TV나 에어컨 버튼들을 조작해도 실제와 비슷한 느낌이다. 가상 공간에서 힘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헵틱이라는 장비와 그래픽 덕이다.

이 기술은 현대자동차에 이전돼 실제 자동차를 디자인할 때 응용되고 있다.

손 박사는 “실물로 자동차를 디자인하면 수십억원의 비용이 든다”며 “가상현실을 이용할 경우 컴퓨터 조작만으로 짧은 시간에 손쉽게 원하는 디자인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디자인용 가상 현실은 냉장고와 가구뿐 아니라 휴대전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의 디자인을 창조할 때 활용된다.

선박 도장 훈련 기기. 손잡이를 당겨도 노즐에서는 아무것도 뿜어져 나오지 않지만 화면에는 페인트가 칠해진다.

이 연구실의 또다른 걸작은 ‘선박 도장 훈련시스템’. 연구원이 입체 안경을 쓰고 그래픽으로 나타난 선박의 벽면을 향해 스프레이 건의 손잡이를 힘껏 당기자 화면에 붉은색 페인트가 칠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스프레이 건에서 뿜어져 나오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가상으로 페인트 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프레이 건을 당기면 얼마만큼의 페인트가 어떤 범위에 뿌려지는지 컴퓨터가 제어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실제 선박에 페인트 칠을 하는 일은 아직도 수작업으로 한다. 신입 기능인이 6개월간 숙련공에게 배워도 제 몫을 하기 어려운 작업이다. 그만큼 고르게 선박 표면을 도장하기가 쉽지 않다. 실습을 하려 해도 페인트 값이 비싸고 독성이 강해 마음 놓고 할 수도 없다.

가상현실 시스템은 이런 문제를 거의 해결했다. 가상으로 칠을 한 뒤 버튼을 누르면 컴퓨터는 도장이 두껍게 된 곳은 하얀색으로, 얇게 된 곳은 파란색 등으로 나타내 준다.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 등 조선업체는 이 시스템으로 훈련한 신입 사원을 2주 만에 현장에 배치할 수 있었다.

탱크와 항공기의 조종법 훈련, 수술 실습, 게임, 마약 중독자 치료 등 가상 현실의 응용 분야가 점차 넓어지고 있다.

글=박방주 과학전문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가상 현실  인공 현실, 가상 세계, 가상 환경, 인공 환경 등으로도 불린다. 특정한 환경이나 상황을 컴퓨터로 만들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마치 실제 주변환경·상황과 상호 작용을 하는 것처럼 만들어 주는 공간 등을 일컫는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기 어려운 환경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도 그 환경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보여주고 조작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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