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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위험하다]2.붕괴하는 기초학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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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서울 D대학 강사 K박사 (29.여) 는 요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왜곡된 우리 근현대사를 바로잡는다는 자부심으로 결혼도 미루고 박사학위를 받은 그녀는 새 학기에 교양과목인 '한국사' 가 폐강되자 학과장의 배려로 새로 개설된 '성 (性) 과 역사' 란 강좌를 맡긴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자신의 학문적 자존심이 이처럼 희화화 (戱畵化) 되는 데는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K박사와 달리, 이미 몇년전부터 변신을 시도한 발빠른 (?) 교수들도 있다.

부산 K대학 모교수는 '성과 철학' 강좌를 개설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일부 지방대 인문학 교수들은 학생들의 취업을 외면할 수 없어 개설과목과 조금이라도 관계있는 영어책을 골라 영어교육을 하고 있다.

이번 학기에 서울대에서 과목에 따라 '수강생 3~17미만' 이란 기준에 미달해 폐강된 3백86개 강좌의 대부분은 기초학문이다. '한국근대사상사' '동양사특강' '논리와 비판적 사고' '종교현상학' '고고학사' 등 역사.철학.종교를 비롯해 제2외국어 다수와 '정치학개론' '국제정치학방법론' '특수사회학' '매스컴과 현대사회' 등 각 전공의 기초에 해당되지만 강의가 어려워 학점 따기가 쉽지 않은 과목들이다.

고려대의 경우 폐강된 77개 강좌도 대부분 난이도가 높은 전공과목이거나 제2외국어 과목들이며 연세대에서도 31개 폐강된 강좌 중 '수학' '수치해석' '유기구조론' '현대물리학' '유기화학' '확율 및 통계' '현대물리학' '기초전자기학' 등 자연과학의 기초과목들이 다수 포함됐다.

속을 들여다보면 더 착잡하다. 서울대에선 '한문강독' 은 처음 1백여명이 신청했다가 리포트.강독 등 수업이 빡빡하게 진행되자 2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법학.컴퓨터공학.영문학.경제학 등 실용적인 분야도 고시나 취업에 직접 관련이 없는 기초과목이면 여지없이 수강생이 급감하고 있다.

'법사상사' '법사회학' 등은 썰렁한 반면 민법.형법 등 고시과목만 몰리는 형편이다.

대신 '구강과 보건' '에어로빅' '음악감상' '볼링' '영어실습' '컴퓨터실습' '영화감상' 등 취미과목이나 성 (性) 적 호기심을 가미한 '성과 000' 등은 강의실이 비좁을 지경. 수강생이 급감하거나 폐강된 과목의 관련 교수들은 연구의욕이 크게 떨어지고 결국 기초학문의 붕괴로 연결된다.

학문의 기초분야가 무너지면 연구자 재생산에 결정적 타격을 입고 실용학문마저 무너지며 경제적 위기는 물론 문화적 공황까지 야기하게 된다.

서울대의 경우 이미 한문을 비롯한 제2외국어가 필수적인 인문사회과학의 학부는 물론 심지어 대학원에서도 강독이 불가능한 상황. 서울 인근의 I대학 독문과의 한 교수는 자신이 적극 권유해 제자들을 독일로 어학연수를 보내지 않고 미국으로 보냈다면서 곤혹스러워했다.

최근의 이같은 현상은 경제적 불황과 학부제라는 맞파도 때문이다. 취업이 어려워지자 이에 필요한 과목을 선호하는 경향에다 학부제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36학점 (12과목) 만 이수하면 전공학위를 주는 학부제는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에 맞춰 복수전공이 가능하며 결국 '한국사' 등 교양필수는 물론 전공필수도 없애는 상황을 몰고 왔다.

이러다 보니 교수는 있으나 학생이 없는 학과가 생길 수밖에 없다. 많은 대학에서 기초과목 교수들은 자신의 과목이 폐강돼 장차 재임용에서 탈락되지 않을까 불안해 할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교수들은 '손님' 을 끌기 위해 쉽고 재미있게 강의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점이 짜다는 소문이 나면 당장 강의실이 썰렁해지기 때문에 이 점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지난 4월 한 대학 교수협의회가 마련한 공청회에서는 일부 기업체가 이미 대학의 성적을 믿지 않는다는 얘기들이 공공연하게 나왔다.

서영수 교수 (단국대.한국사) 는 "학부제는 결국 기초과목 연구자의 대량 실업으로 이어져 국가적으로 정신적 공황을 초래하게 될 것" 이라고 우려했다.

김영명 교수 (한림대.정치학) 는 "학부제의 조급한 운영은 얼마 못가 대학을 거덜나게 할 뿐 아니라 현재의 IMF위기보다 더 심각한 위기를 가져올 것" 이라며 '참을 수 없는 교육의 가벼움' 을 개탄했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wjsan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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