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i Ho! 운이 좋았을 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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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호 11면

안녕하세요. 저는 ‘영어’입니다. 100만 번째 단어의 탄생에 부쳐 보내주신 축하 e-메일 감사합니다.

RE : 영어氏, 100만 번째 단어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100만 번째 단어는 웹 2.0이라고 하더군요. 좀 더 재밌는 신조어가 선정될 줄 알았는데 약간 실망스럽기도 하네요. 영화 ‘슬럼독 밀레니어’ 덕분에 잘 알려진 ‘슬럼독’이 그 영광을 차지할 거란 얘기도 있었죠. 주로 인도 언론들의 기대였지만요.

하지만 100만 번째 영어 단어라는 말에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도 많습니다. 보수적인 학자와 사전 편찬자들, 정통 언어학자들이죠. 비속어나 인터넷 신조어, 유행어를 단어로 인정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권위 있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수록된 단어 수도 60만 개 정도에 불과하거든요.

‘60만 개에 달하는 버섯균류의 이름은 왜 안 넣는 거지? 동사 하나를 원형 따로, 과거형 따로, 과거분사형 따로, 동명사형 따로 세서 단어 4개로 하는 건 왜 안 된다는 거야?’

영국 타임지의 한 칼럼니스트가 던진 비아냥이었습니다. 하하하, 일리 있는 지적이죠. 100만 번째 영어 단어라는 건 다분히 수학적이고 기계적인 결론입니다.

이번 소동을 일으킨 GLM은 2003년 설립된 미국 텍사스의 작은 회사입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 옥스퍼드 사전 출판부(1928년 첫 사전 편찬), 미국 미리엄 웹스터 사전 출판부(1847년 첫 사전 출판)와는 다르죠. GLM이 개발한 것은 많이 쓰이는 영어 단어를 자동으로 추출해 내는 시스템입니다. 세계 주요 신문과 잡지, 인터넷, 개인 블로그 등을 검색해 기계적으로 단어 수를 계산합니다. 이 시스템은 2만5000번 이상 쓰이고, 세계 여러 곳에서 사용되며, 동물·식물학 등의 학술 용어가 아니라면 독립 단어로 봅니다. 98분마다 하루 14.7개의 영어 단어가 새로 만들어지고 있답니다.

GLM 대표 폴 페이액은 “언어란 사람들 간 소통의 도구다. 여러 나라에서 동일한 뜻으로 많은 사람이 사용한다면 단어로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어쨌든 현재로선 영어가 세계 제일의 언어라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물론 가장 많은 사람이 모국어로 사용하는 언어는 중국어입니다. 스페인어 사용자 수도 영어 못지 않게 많습니다. 하지만 언어의 권위를 결정하는 것은 사용자 수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이 사용하느냐죠. 지금 세계의 리더들이 모이는 국제회의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영어입니다. 인도나 중국에서도 출세를 위해선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죠. 영어는 공식 무대에서 세계인의 의사소통 수단이 됐습니다.

비결이 뭐냐고요? 운이 좋았죠. 사실 영어가 세계적 언어가 된 건 겨우 500여 년 전입니다. 그전엔 제 고향에서도 찬밥 신세였어요. 로마제국이 영국을 지배하던 시대(BC 55년~AD 410년)엔 라틴어가 최고였습니다. 프랑스 귀족들이 영국 왕실을 장악한 11~13세기에 영국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였죠. 영어는 하층 계급의 언어였을 뿐이에요.

그때 누군가 ‘영어가 언젠가 세계 보편 언어가 될 것’이라고 했다간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었을 걸요. 하지만 그런 시련 속에서 영어는 더 풍부해질 수 있었죠. 문법도 단순해졌고요. 그 때문에 알파벳 표기와 발음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져 영어 학습자들을 피곤하게 하지만요.

영어의 지위가 좀 나아진 건 16∼17세기 영국의 국력이 커지면서죠.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 만들어졌으니까요. 20세기엔 세계 최강국 미국의 언어로 전 세계를 주도했습니다. 언어가 힘을 얻으려면 그 언어를 쓰는 나라의 힘이 세야 하니까요. 하지만 영어가 확고한 세계 공용어로 자리 잡은 것은 1960~70년대입니다. 인터넷의 발달과 국제 교류의 급증으로 영어 사용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지구상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현재 15억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콩글리시(한국어+영어), 칭글리시(중국어+영어), 스팽글리시(스페인어+영어), 힝글리시(힌두어+영어)라는 말도 있죠. 각국 언어와 영어가 결합된 현상입니다. 이 모두 영어를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앞으로도 영어가 세계 제일의 언어일까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그럴 거라고 믿는 사람들은 이미 영어 사용인구가 임계점을 넘었다고 봅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영어를 쓰기 때문에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거죠. 하지만 미국을 대신할 강대국이 등장해 다른 언어가 힘을 얻는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쨌든 현재 영어 단어의 수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요. 자이 호! (신나는 일이 있을 때 쓰는 힌두어죠. 99만9999번째 단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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