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구조조정이란 지옥열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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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보통 한 사회가 외부로부터 큰 충격을 받게 되면 처음에는 놀라서 멍한 상태를 지난 다음에는 반발심리가 발동한다. 그래서 상류계층이나 지도세력에 하소연해보지만 그들이 해결능력이 없으면 스스로 이익을 챙겨보려는 과정에서 사회적 혼란은 심해진다.

기득권층은 거부된다. 그러다가 체념 또는 방관의 자세를 갖는 단계를 지난 후 비로소 나름대로 새 질서에 적응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인다.

기존의 질서를 뒤엎고 전혀 새로운 지도층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전개론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은 반발심리후 혼란악화의 단계에 있다.

누구도 신용이 없어서 중심적 역할을 못하고 사회 전체가 방향없이 서로 혼자라도 살겠다고 나서는 형국이다. 이대로 좀 더 가면 의외로 많은 대기업들의 추가부도, 일부금융기관의 폐쇄, 산업조직의 붕괴, 실업자 홍수는 분명하다.

정부조직도 기능을 잘 발휘할지 의심스럽다.외환위기와 금융경색.산업조직붕괴의 악순환이 확대되고, 사회위기로 이어질 개연성은 높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외국인투자가들은 벌써 도망갈 태세를 갖추고, 해외신용평가기관들은 한국금융시장에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를 보내고 있다.기업채산성제고와 재무구조개선, 금융시스템붕괴 예방조치가 없으면 제2의 외환위기.금융위기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구조조정을 위해 '남은 시간은 별로 없는데, 할 일은 많다' .기업과 금융기관들의 행보가 너무 느려서 외국손님 다 도망가게 생겼기 때문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겠다고 나서게 됐다. 그러나 아무일에나 정부가 행정력을 동원한다고 시정결과가 빨리 나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부는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구조조정을 빨리 하는 게 유리한 여건과 틀을 만들고, 그 틀에서 벗어나면 시장의 힘에 의해 즉시 죽어버리도록 만드는 게 상책이다. 우리나라처럼 단일민족국가에다 온정주의.집단이기주의가 뒤범벅돼 있고 과거의 불균형 성장정책 때문에 모두가 나름대로 핑곗거리가 있는 상황에선 누군들 살생부를 집행해내지 못하게 돼있기 때문이다.

자동도살장치에다 시체 폐기물처리가 빨리 되고, 재활용.재생하는 시스템이나 잘 만드는 게 급하다.동시에 정부는 다른 경제주체 (기업.금융기관.일반인) 들에게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정도나 시기면에서 그들의 시범만 돼주면 더 바랄 게 없다.

이렇게만 되면 경제구조조정은 지옥열차처럼 정해진 궤도 위를 정신없이 달리다가 나름대로의 모습을 그려낼 것이다. 국책연구소나 부도난 투신사 정도도 구조조정을 못 시키면서 공기업.정부조직.은행산업을 어떻게 탈바꿈시킬지, 민간에게 무슨 변신을 크게 요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구조조정이 필요한 부문 종사자들이 오히려 태업을 하도록 방치하면서 무슨 진척이 있겠는가. 한편 우리의 궁금증은 이번의 구조조정이 '일시적 고통' 이냐, '장기간 침체의 악순환고리' 의 시발점이냐에 있다.

필요이상의 국부유출이나 산업조직의 붕괴, 인적 자원의 폐기가 생기지 않도록 만드는 지혜가 담긴 종합프로그램을 원하고 있다. 시기별로 구조조정의 목표치와 기준, 추진주체와 그 체계도, 추진일정과 추진에 동원될 정책수단, 그 정책수단을 뒷받침할 재원마련 계획과 법제, 예상되는 부작용의 해소방안 내지 고통분담 제안, 그 과정중 각계각층은 각자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어떤 모습의 미래를 꿈꿔야 할지를 가르쳐 줘야 한다.

앞으로 불확실성이 확대재생산될 개연성이 높을수록 그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는 정책노력은 강화돼야 한다.

상황을 봐가면서 대처하겠다는 식의 접근방법도 일리가 있지만, 지금과 같은 위기에는 동양화같은 큰 그림 그려놓고 서양화처럼 빈칸을 나름대로 메운후 (선택) , 과감한 실천을 할 뿐이다. 예를 들어 기업구조조정의 추진체로 금융기관을 선택했으면, 금융기관의 정비를 먼저 끝내고 그 책임자가 몇 년동안 자신있게 부실채권을 정리하도록 힘을 실어줘야 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금융기관의 손실은 어떤 방식에 의해 정부나 예금자보호기구.금융기관주주.금융기관임직원.채권자와 예금자 등간에 배분할 것인지 확실히 보여져야 하는 것이다. 또 연이어지는 협조융자, 회생가능 대기업에 대한 특별지원, 중소기업대출기한연장 등 모두 그럴듯하지만 금융기관들의 추가자금 부담해소를 위해 재정은 무슨 역할을 얼마나 하는지 보여줘야 금융당국의 약속이 시장에서 실천되리란 믿음이 생긴다.

외자를 빨아들일 수 있는 기업군은 어디인지도 빨리 보여져야 한다. 잘 나가면 발목잡는 양태로는 안된다.

이한구 대우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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