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정치에서의 魔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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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그 책임이 시공한 건설회사에 있느냐, 교량관리를 맡았던 시울시에 있느냐로 논란이 있었다. 당연히 결론은 양쪽 모두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났다.

경중의 차이는 있으나 책임을 묻는 쪽에서는 어느 한쪽을 두둔한 일도 없다. 근래에 환란 (換亂) 으로 불리는 경제위기의 책임을 놓고 얘기가 이상한 흐름으로 가고 있다.

발단은 김영삼 (金泳三) 전 대통령과 임창열 (林昌烈) 전 부총리의 말이 엇갈리는데서 시작됐다.金전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 (IMF) 으로 가는 얘기를 林씨에게 세번이상 했다는 것이고 林씨는 들은 적이 없다는 것. 이 상반된 주장을 놓고 여야가 맞서 있다.

여당은 金전대통령의 말을 믿을 수 없으니 청문회에 출석시켜 해명을 들어야겠다는 것이고 야당은 林씨가 거짓말을 하니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쟁은 빗나가도 많이 빗나간 것이다.

金전대통령이 林씨의 부총리 임명 전후에 IMF 얘기를 세번 이상 했다고 치더라도 그로써 경제위기에 대한 金전대통령의 책임은 없는 것인가.

그와 반대로 金전대통령이 그 얘기를 林씨에게 하지 않았다고 해서 林씨에겐 책임이 없는 것인가. 우리 경제위기는 달러 고갈에서 시작됐다지만 엄격히 얘기하면 대외신용 추락에서 시작됐고 그 바닥엔 외화내빈 (外華內貧) 의 우리 경제구조가 있었다.

그렇다면 경제부총리가 경질되던 지난해 11월19일 전후 며칠.몇주일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며칠 상관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물며 IMF로 가는 것을 그 며칠 사이에 누구에게 알렸다, 안알렸다, 혹은 누구는 알았다, 몰랐다 하는 것으로 책임의 선 (線) 이 그어질 수는 없다.金전대통령 주장대로 IMF에 대한 지원요청 방침이 정해졌다면 한 두 사람만 알도록 방침이 정해졌을리 없고 지원요청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해도 한 두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을 수 없다.

책임은 정권적 차원에 있을 뿐이다. 이런 명백한 일을 놓고 "알려주었다" "못들었다" 는 말씨름이 책임규명의 열쇠처럼 돼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정치에서 마술을 부리려 하기 때문이다.김영삼정권에서도 섣부른 마술이 있었다.

12.12, 5.18, 언론통폐합을 준엄히 심판한다면서 문민정부는 어떠했는가.

관련자를 우선 토막을 쳐 한 토막을 내편으로 붙여 공천도 하고 요직에도 기용했다. 그리고 다른 한 토막은 형무소로 보냈다. 한 토막을 내편으로 묶은 것은 '다수 (多數) 의 지배는 민주주의적' 이라는 잘못된 신앙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내편' 으로 붙인 토막에는 '관대' '능력위주' 라는 미명을 붙였고 '저편' 에는 '개혁의 대상' '역사의 심판' 을 내세웠다. '국민의 정부' 라는 새 정부도 마술을 하는 듯하다.

정권적 차원의 책임문제에서 우선 토막을 쳐 일부를 내편으로 끌어 넣었다. 그리고 나머지 토막에 책임을 몰기로 한 듯하다.

마술에서는 상자속에 사람을 넣어 자물쇠로 잠그고 톱으로 그 상자를 자른다. 청중들은 손에 땀을 쥐고 긴장한다.

마술사는 갈라진 상자를 다시 합쳐 보자기를 씌웠다가 훽 들춘다. 멀쩡한 사람이 두손을 번쩍 들고 뛰어나오면 청중속에서 환성과 박수가 터져나온다.

이런 마술은 고기술의 속임수다. 관중들은 속임수임을 알면서도 그 기술에 박수를 보내고 한때를 즐긴다.

정치는 마술일 수가 없다. 경제위기의 책임을 묻는 톱날이 번득일 때 국민들에게 긴장감을 주지만 그 톱날의 행방이 투명성을 갖추지 못했을 때의 결과는 무엇인가.

정치에 대한 실망.불신밖에 남을 것이 없다.

경제위기를 초래한 책임을 가리자는데는 두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원인.과정을 규명해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한 예방적 목적이다.

둘째는 누구에게 큰 과오가 있는지를 가려 응징하는 것이며 이 응징은 경제의 어려움에서 생기는 불만을 삭이는 사회관리.사회통합의 기술상 불가피하다.

그런데 이번 경제위기의 책임규명이 서투른 마술같이 된다면 예방적 목적도, 사회통합의 효과도 거둘 수 없다. 목적달성의 합리성을 위해 청문회가 사법처리에 선행돼야 한다는 발언도 많았으나 묵살된 채 이상한 방향으로 톱날이 번득인다.

정치를 지켜보는 국민은 마술관객과 다름을 정치인들은 알아야 한다.

김동익 성균관대 석좌교수.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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