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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구조조정의 순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우리나라의 실물경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징후 (徵候)가 여기저기서 불거져 나오고 있다. 3월중 제조업 평균가동률은 85년 통계작성을 시작한 이래 최저치인 65%에 그쳤고, 설비투자는 전년보다 37%나 급락해 9개월째 하락추세를 계속하고 있으며, 내수 (內需) 시장의 소비위축으로 도소매 판매량은 올해들어 매달 10%이상씩 감소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향후 설비투자를 가늠할 기계류 수주는 50%이상 폭락했고 반년후의 경기예측을 시사하는 선행종합지수는 5개월째 큰폭으로 줄곧 하강하고 있다. 지난해말에 65만명이던 실업자수가 3월말에는 1백38만명으로 배가 (倍加) 했으나, 1주일에 17시간도 일하지 못하는 40만명의 불완전 취업자와 15만명에 달하는 임시휴직자를 포함한다면 우리나라 실질실업 인구는 3월말에 이미 2백만명에 육박한 셈이다.

정부당국과 국제통화기금 (IMF) 은 우리나라 콜금리가 4월에 3%나 하락해 19%에 이르고 3년만기 회사채 유통수익률도 18%대로 안정됐다고 자위하는 모습이나, 종금사와 파이낸스회사등에서 서민들과 일선 기업가들이 느끼는 체감금리는 여전히 30~40%에 머무르고, 5대그룹의 몇몇 대기업들을 제외한 여타 유수업체들의 어음은 아직도 37~38%대에 할인되는 상황에서 과연 우리나라 실물경제가 올해를 제대로 버텨나갈는지 의문이다. 시장경제의 근본인 기업들의 초토화 (焦土化) 를 예방하자면 정부는 실기 (失機) 하지 말고 당장 경제비상시국을 선포하고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한다.

그러나 효과적인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그 순서를 바로 인식해야 한다. 우리 경제의 최대현안은 기업들을 고사 (枯死) 시키고 있는 고금리요, 그 배후에는 고금리 상품으로 하루살이 목숨을 지탱하고 있는 부실금융기관들이 존재하고 있다.

주택금융회사인 저축대부협회 (S&L) 들의 대량 부실로 80년대에 금융위기를 맞았던 미국은 과감한 S&L 통폐합의 정공법 (正攻法) 으로 속전.속결의 결과를 이룩했었다.

반면 90년 이후 눈덩이처럼 불어난 부실여신에 발목잡힌 불량 은행들 처리에 늑장부려온 일본에서는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금융위기의 끝은 보이지 않고 갈수록 앞만 더 캄캄한 형편이다. 우리 경제가 미국식의 V자형 회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부실 금융기관 통폐합을 선행해 하루빨리 '고금리 펌프' 를 중단시켜야 한다.

금융기관들의 구조조정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일본식인 U자형으로 우리 경제의 회생이 그만큼 늦어질 것이다. 우리와 비슷한 형편에 처한 태국은 15개 일반은행중 이미 4개를 처분하고 두개는 네덜란드와 싱가포르의 은행들에 팔아치우는 등 발빠르게 행동하고 있다.

나머지 태국은행들도 국제회계제도를 도입해 부실채권의 범위를 보다 엄격히 규정하고 국제결제은행 (BIS) 기준의 자기자본율 확충을 제도화해 새로운 금융질서를 도입하고 있다.

금융이 선진화하면 기업들의 구조개혁은 자연히 이뤄진다.

미국에서는 정부가 강제로 기업들에 부채율을 2백%로 내리고 주력기업을 몇개로 줄이라는 인위적 구조개혁을 안해도 은행과 자본시장으로부터 자금을 계속 공급받기 위해서 자연히 회사들 스스로 자기생존 차원에서 부채비율을 내리고 모든 투자의 수익률을 꼼꼼히 따지며 장래성이 안 보이는 업종은 과감히 처분한다. 정부의 간섭이 없어도 사업의 성격상 자동차.건설.중공업 등 경기성 (cyclical) 업종 회사들은 낮은 부채율을 갖고, 전력.전화.통신 등 비경기성 업종의 회사들은 높은 부채율을 가져도 위험성이 낮아 은행과 자본시장으로부터 수월하게 자금을 제공받고 있다.

금융계가 건전하면 이처럼 기업의 구조개혁은 시장경제의 원칙에 따라서 회사들 스스로 알아서 하게 되고 그렇지 못한 회사들은 자연히 도태되게 마련이다.

정부는 우리나라 재벌들의 부채비율과 주력기업 선정 등에 인위적으로 간섭하기 보다 국제회계제도 도입 등으로 경영의 투명성을 보장하고 소액주주권과 사외이사제도를 강화해 기업의 지배구조를 현대화하며 상호지불보증과 불공정 거래 등을 금지시켜 시장경제체제를 확립할 때 우리나라 기업들도 자연히 잃었던 국제경쟁력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길만이 우리가 지향하는 시장경제적이요 효과적인 구조조정의 방향이다.

박윤식<미국 조지워싱턴대 교수.국제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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