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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제3장 함부로 쏜 화살

그 여자가 주문진의 영동식당에 나타난 것은 공교롭게도 변씨와 봉환이가 양양지방으로 떠난 이튿날 오후였다. 영동식당의 간판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던 그녀는 그러나 곧장 미닫이문을 밀치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지는 않았다.

영동식당이란 간판이 걸려 있는 또 다른 선술집은 없는지 확인하려는 듯 골목 안팎을 두루 탐지하는 동안 그 여자의 표정은 사뭇 긴장되어 있었다. 드디어 확신을 얻은 그녀가 가게문으로 다가갔다.

잠그지 않은 문을 조심스럽게 밀치고 정적이 감도는 가게 안으로 고개를 디밀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인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그녀를 맞이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서슴없이 술청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식탁의 의자를 끌어 당겨 앉았다.

비릿한 냄새가 배어 있긴 하였지만 술청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술청에 놓여 있는 식탁은 모두 다섯 개. 한결같이 행주질이 되어 있었다.

거실로 보이는 안방문은 닫혀 있었고, 그 방 앞으로 조리대가 보였다. 조리대 뒤편으로는 찬장과 선반이 사람의 키높이와 알맞게 나란히 배열되어 있었다. 유리문이 달린 찬장에는 갖가지 양념그릇들과 조미료병들이 오밀조밀하게 놓여 있었고, 선반에는 물끼가 빠져 반질거리는 접시와 술잔들과 식기들이 가지런했다. 그녀는 힐끗 문 밖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골목 밖의 인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그녀는 일어나서 조리대와 마주보고 있는 안방의 문을 가만히 열어 보았다. 역시 쓸고 닦은 흔적은 뚜렷하였지만, 놓여 있는 가구는 실망할 정도로 절제되어 있었다.

방 윗목에 흰색 도료를 입힌 작은 옷장 하나 놓여 있는 게 고작이었다. 옷장에 붙어 있는 거울 앞에 몇 가지 기초화장품이 담긴 작은 바구니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 가게의 주인은 방에서 이루어지는 부부생활보다는 술청의 일에 열중하고 있다는 흔적이 너무나 뚜렷했다.

그 순간 여자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치고 지났다. 아쉬운 듯 문을 닫은 여자는 다시 의자로 돌아와서 앉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장 조리대 뒤편에 있는 또 하나의 문을 발견하고 일어섰다.

세탁실을 겸한 목욕실이었다. 바닥에 놓여 있는 자배기는 비어 있었다. 한 방울의 물도 아끼려는 절약의 습성이 몸에 밴 여자가 살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고무호스가 연결되어 있는 수도꼭지를 가만히 비틀어 보았다.

자배기 속으로 늘어뜨린 호스 구멍으로 맑은 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호스를 들어 꿀꺽꿀꺽 물을 마시고 나서 입언저리를 훔쳤다. 그때,가게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스라친 그녀는 욕실문을 열려다 말고 멈추어 섰다.

힘에 겨운 숨소리를 토하며 들고 온 물건을 조리대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출타중이었던 이 집의 주인이 돌아온 게 틀림없었다.

승희였다. 그녀는 집에 낯모르는 여자의 가택침입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찬장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까무라칠 듯 놀랐다.

찬장문을 열려는 순간, 찬장에 붙어 있는 유리를 통해 어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찔하게 소스라친 승희의 눈길에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술청으로 가다 말고 서 있는 한 여자의 얼굴이 얼른 스쳐 갔다. 가위질린 목소리로 누구세요 라고 반문했던 승희는 떨리는 두 다리를 조리대를 잡으며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금방 등골에서 진땀이 흘러 내렸다. 불시에 사람을 놀라게 만든 장본인도 난처한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하면서 조리대를 비켜 술청으로 나섰다. 그녀는 자신이 앉았던 의자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식탁위에는 그녀의 것으로 보이는 검은색 여행용 가방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사십대 초반의 나이로 보이는 그 여자는 의자에 걸치고 앉자마자, 여행용 가방 안을 뒤져 담배와 일회용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승희에게 물을 마시면 놀란 가슴이 진정될 것이라는 말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아찔한 기운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승희는 붙박인 듯 서 있기만 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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