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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19.단군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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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12면

오늘은 좀 미묘한 얘기를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동안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 독자 중에는 왜 단군릉을 정식으로 언급하지 않느냐고 질문해 온 분이 몇 있었다.

또 내가 아는 역사학자.고고학자 중에는 단군릉을 어떻게 쓸 것이냐고 반은 걱정이 돼 말한 분도 있다.솔직히 말해 나는 단군릉 문제는 피해 갈 생각이었다.

북한문화유산답사기를 쓰면서 남한 지역을 말한 때와는 달리 심각하게 고려한 두가지 사항이 있었다.하나는 분단 52년만에 처음 빗장을 열고 들어가 직접 안살림을 보고온 사람으로서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한평생을 사이좋게 지내온 부부 사이에서도 반드시 건드려서는 안되는 부분이 있는데, 오랜 별거 끝에 문화유산을 통해 재결합을 시도하는 마당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은 대승적 차원에서 피해가겠다는 생각이었다. 단군릉이 바로 그런 유적이다.

단군릉은 해방 후 고고학계가 내세우는 최대의 업적이다. 이에 반해 남한의 고고학자들은 이미 단군릉의 허구성을 성토하는 글을 여러분이 발표했고, 북한의 단군릉 발굴보고에 동의하는 학자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단군릉은 떨어 두고 지나가기엔 너무도 잘 알려진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 심각한 견해차이 때문에 오히려 재결합이 의문시되고, 또 사실과 다른 오해까지 생긴다면 차라리 저간의 논쟁과 의문점을 그대로 드러내 온 국민이 공유하는 편이 옳은 것도 같다.

그런 심정에서 나는 이제 북한에서는 단군릉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남한에선 많은 사람이 북한에서 어느날 갑자기 단군릉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황당하게 복원해 놓은 것으로 알고 있다.

평양에 가기 전까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단군릉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현지를 답사해 보니 단군릉은 북한에서도 '복원 (復元)' 했다고 말하지 않고 명백히 '개건 (改建)'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단군릉은 5천년 전 유적이 아니라 20세기 유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남한에서 아산에 현충사를 만든 것이 조선시대 유적이 아니라 20세기 기념건축인 것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다. 문제는 단군릉의 존재여부다.

평양에서 단군의 뼈를 발견했다고 처음 발표한 것은 1993년이었고, 단군릉에 대한 종합적인 공식보고는 1994년 사회과학출판사에서 펴낸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연구론문집' 에서 발표했다. 이 논문집에 따르면 평양시강동군문흥리 대박산 동남쪽 기슭에는 옛날부터 단군릉이라고 전해오는 작은 무덤이 하나 있었다.

이는 무덤 앞에 세워져 있는 '단군릉 기적비' 로 알 수 있는데, 이 비는 일제가 단군릉을 파괴한 것에 분노한 평양시민들이 '단군릉 수축기성회' 를 만들어 1936년 세워놓으면서 민족혼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역사.고고학자들은 이 단군릉을 별로 주목하지 않아왔다. 왜냐하면 우선 단군릉의 묘제가 고구려식 무덤이고, 또 단군의 고조선은 평양이 아니라 랴오둥 (遼東) 지역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저 전설상의 단군릉으로 치부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의 강역이 랴오둥이 아니라 평양을 중심으로 펼쳐졌다고 믿는 학자들이 줄곧 있어 왔다.이들은 고려사와 조선중기 기록에서도 평양의 단군릉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530년에 완성된 '신증 동국여지승람' 의 강동현 조에 현 서쪽 3리에 둘레 4백10자나 되는 큰 무덤이 있는데 이를 단군묘라고 한다는 기사에 주목한다.

또 '조선왕조실록' 에 보면 숙종 때 (1697년) 는 강동의 단군묘 수리 얘기가 나오고, 영조 때 (1739년) 는 단군묘 보수.관리 지시가 나오고, 정조 때 (1786년) 평안감사에게 강동사또가 봄.가을로 단군묘에 제사지내는 것을 제도화하라는 지시사항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단군릉 일대에는 대박산 (밝은 산) 을 비롯해 단군호 (湖).단군동 (洞).아달동 등 단군과 관계된 지명과 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논쟁이 오가고 있던 중 김일성 (金日成) 주석이 논쟁만 하지 말고 발굴해 과학적으로 구명하라며 '단군릉 발굴에 대한 교시' 를 내렸다.

발굴 결과 놀랍게도 두 사람의 뼈가 모두 86개 나왔다. 주로 팔 다리뼈와 골반뼈였다.

사회과학원에서는 서로 다른 두 연구기관에 연대측정을 의뢰한 결과 '전자 스핀 (SPIN) 공명법' 으로 각각 24회, 30회에 걸쳐 측정해 1993년 기준으로 5011±267년이라는 값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인골은 다름 아닌 단군과 그 아내의 뼈로 인정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무덤 양식이 고구려식으로 반지하의 외칸무덤이고, 금동왕관의 앞면 세움장식과 금동띠의 패쪽, 그리고 여러 도기 조각이 모두 고구려 유물이냐는 문제가 남았다. 그것은 아마도 고구려 사람들이 동명왕릉을 개축할 때 단군릉도 같이 손 본 것이 아닌가 추정됐다.

이리하여 김일성주석은 생전에 단군릉을 재건해 민족의 시조로 예우를 다할 것을 지시해 능의 위치를 현위치에서 2백m 위쪽으로 직접 잡아주었다. 그리고 단군릉 개건 마스터 플랜을 지휘 감독했다.

그 장대함이란 거의 무지막지한 경지에 이를 것이다.

단군릉은 광개토왕릉으로 추정되는 통구의 장군총을 본뜨되 그 3배 되는 크기로 9층의 계단식 돌각담 무덤 형식을 취해 한변 50m, 높이 22m로 축조됐다.

화강암 돌은 1994년에 개건됨을 기념해 1천9백94개로 짜 맞췄다고 한다.

네 모서리에는 우람한 돌호랑이를 수호상으로 세우고 그 앞에는 고조선의 상징적 무기인 비파형 동검을 높이 7m의 크기로 네군데 세웠다. 입구에서 능까지는 2백79단의 화강암 돌계단으로 이뤄졌는데 나는 이처럼 눈부시게 높은 돌계단은 영화 '벤허' 에서 본 것 말고는 처음이었다.

돌계단 중간의 넓은 단에는 선돌 (立石) 모양을 본뜬 돌기둥이 대문을 대신하고 계단 양편으로는 단군의 네아들과 여덟명의 측근 신하로 호위케 했다. 그리고 단군릉에서 내려다 보면 오른쪽의 우백호자리에는 문흥리 고인돌 3기가 의젓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왼쪽의 좌청룡자리에는 20여리 떨어진 후탄리에서 옮겨온 선돌이 짝을 맞추듯 세워져 있었다.

그러면 북한에서는 왜 단군릉 개건에 그렇게 열중했는가라는 물음이 남게 되는데 이에 대해선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의 장정신 (張正信) 관장이 대담 중에 "주체를 올바로 세우는 뜻에서 3대 시조릉에 대한 재건사업을 전개했다" 고 한 말의 행간 속에서 읽을 수 있게 된다. 즉 고조선의 단군, 고구려의 동명성왕, 고려의 왕건, 그런 식으로…. 김일성주석은 결국 자신의 생애 마지막 대역사였던 이 단군릉 개건사업의 완성을 3개월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고, 1994년 10월29일에 그 유훈을 이어 준공을 보게 됐다.

그것이 지금의 단군릉인 것이다.

글 = 유홍준 (영남대교수.박물관장)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다음 회는 '주영헌 선생과의 대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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