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세기말문화혁명]10.끝 '로컬'이 뜨고 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스페인의 북동부와 북서부는 바스크족이 사는 지역이다. 국제영화제로 이름높은 산세바스티안, 탄광촌으로 유명한 빌바오, 그리고 시민에 대한 무차별 폭격으로 피카소 그림의 소재가 됐던 게르니카가 있는 곳이다. 분리독립주의자들의 무차별 폭탄테러와 살인테러로 아직도 화약냄새와 연상작용을 일으킨다.

하지만 분리투쟁보다 바스크인의 민족의식을 더욱 고취시키는 것. 바로 82년부터 방영이 시작된 '에우스칼 텔레비스타 (Euscal Telebista)' 라는 이름의 바스크어 방송이다.

다시 92년 올림픽이 열렸던 스페인의 동남부, 바르셀로나가 자리잡은 카탈루냐 지방. 스페인어가 아닌 카탈루냐어를 모국어로 쓰는 주민들의 거주지역이다. 여기서도 83년 이후 'TV3' 라는 카탈루냐어 방송이 계속되고 있다.

둘은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갖고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주민들은 지역어를 모국어로 먼저 익히고 학교에 들어가서야 스페인어를 배운다. 그럼에도 80년대초까지 중앙인 스페인어 문화권의 문화가 일방적으로 유입됐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개방사회가 되면서 "이제는 우리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는 독자적인 지방 방송국 설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들은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중앙방송에서는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지역문화를 적극 반영하고 지역주민 특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때문에 중앙의 스페인 문화와는 분위기가 다른 지역특유의 현대문화를 창조.보존.보급하는 중심지 노릇을 한다. 지역내 시청률은 중앙 채널을 단연 압도한다.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이 글로벌 시대의 흐름을 뒤덮고 있다고나 할까.

영국 서부지역의 웨일스도 같은 경우다. 82년부터 시작한 '시아날 페드와 심루 (Sianal Pedwar Cymru)' 란 이름의 웨일스어 방송이 단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영어를 웨일스어와 동시에 모국어로 하는 이중언어지역에서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분명히 찾겠다는 것이 설립의도다.

이런 사례는 비단 언어가 다른 지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심지어 같은 언어를 쓰는 지역 안에서도 지방성을 강조하는 지역방송망이 가동중이라는 사실은 지역문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는 하나의 징조다. 지역방송 연합 네트워크인 'ITV (인디펜던트 텔레비전)' 가 그 대표격.

이 채널의 각 지역 방송국들은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까지 만들어 ITV망을 통해 방영하지만 자기 지역에만 방영하는 프로그램도 전체의 40%에 육박한다. 우직한 고집인가, 아니면 또다른 의미를 실은 것인가. 바로 중앙문화와의 차별화. 달리 말하면 지역문화의 확산을 통한 독자적인 시장확보 전략인 셈인데 실로 눈여겨볼 일이다.

잉글랜드 북서부 맨체스터의 지역방송인 그라나다TV는 지역을 기반으로 영국전역은 물론 전세계에 맨체스터식의 유쾌한 프로그램을 팔고 있다. 시청자가 보내온 해프닝 비디오를 방영하는 '당신이 화면에 잡혔어요' 라는 프로그램은 미국의 '올 아메리칸 홈비디오' 의 원조격으로 전세계 30여개국에서 볼 수 있다. 글로벌 상황 아래서 지역문화는 세계를 시장으로 삼을 수 있는 다양한 문화적 표현의 한 형태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프랑스3' 방송은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부 알자스 지역에서는 알자스어로 방송을 내보낸다. 알자스어란 사실상 독일어의 한 방언이다. 프랑스인들은 알자스어를 못 알아듣지만 독일인은 이해할 수 있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세우고 유지해온 프랑스에서도 문화적 지역화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놀랍다.

유럽에서는 이제 '제4세계' 가 나타나고 있다고들 한다. 제3세계라는 말에서 나온 조어다. 한 국가 안에 있지만 언어적 또는 문화적으로 중앙정부와 다른 작은 '지역' 을 일컫는 말이다. 물론 경제적 수준과도 관련이 있다. 유럽전역은 1백여개의 작은 지역으로 나뉜다. 심지어 언어가 같아도 서로 문화적 배경이 다르면 독자적인 지방문화를 발전시키려는 경향을 보인다.

유고내전의 당사자들인 세르비아계.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람들이 사실은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언어보다도 지역주민의 문화적 정체성이 더욱 중요한 시대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언어를 쓰는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서로 분리된 것도 마찬가지로 문화적 이유가 컸다. '국가' 가 세분화된 '지방' , 그 개념변화는 거의 혁명적이다.

유럽연합이 최근 펴낸 '유럽과 글로벌 정보사회' 라는 보고서엔 이런 말이 나온다. "커뮤니케이션 분야를 주축으로 한 미래공간에서의 키워드는 지역의 문화적.정치적 '소집단' 으로 바뀔 것. " 현재 기술의 발전으로 로컬 수준에서도 얼마든지 독자적인 커뮤니케이션 영역을 만들 수 있다. 이 결과 국가의 중앙은 물론 전세계로 직접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로컬의 개념이 새로 형성된다. 이른바 '글로벌.로컬시대' 의 등장이다.

이런 다양한 지역문화의 대두는 새로운 문화시장을 형성한다. 심지어 할리우드에서도 문화적 고향을 분명히 지니지 않은 국제화는 배척받는 분위기다. 로버트 드 니로는 이탈리아계의 이미지로 세계적인 배우가 되지 않았던가. 고향사람만 찾는 행태가 국가적인 문제로 되고 있는 우리사회에서 고향문화의 새로운 창조와 그 문화와 글로벌 문화간의 대화를 시도하는 문화인은 얼마나 될까.

런던 = 채인택 기자 〈ciimccp@joongang. co. 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