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방이냐 장기 억류냐 … 변수는 안보리 제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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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안이 마련되는 미묘한 시점에 억류 중인 미국 여기자 두 명에 대한 재판 결과를 공개했다. 유엔 안보리의 제재를 주도하는 동시에 자국 여기자들의 석방이라는 상반된 두 방향에 ‘올인’하고 있는 미국을 상대로 12년형의 중형을 선고했다. 조선민족적대죄, 비법국경출입죄 등이 적용됐다.

북한이 재판을 마무리지은 것을 놓고 일단 북한이 미국과의 물밑 협상 의지를 비친 것 아니냐는 기대 섞인 관측이 나온다. 한 당국자는 “선고가 나온 만큼 이를 놓고 북·미가 비공개 접촉을 확대할 계기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북한으로선 여기자 문제는 미국을 상대할 칼자루가 되는 만큼 미국과의 협상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미국도 국내 정치적으로 민감한 자국민 안전 문제를 놓고 대북 설득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다.

한 정보 소식통은 “미국은 수십 년이 지나도 자국민 전사자 유해를 북한에서 발굴하는 나라”라며 “북미가 물밑 접촉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석방이라는) 기본 방향을 놓고 의견 접근 과정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다른 외교 소식통은 “북한은 이 사건의 해결 과정을 북·미 관계 물꼬를 트는 기회로 삼으려 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이 과거 억류 미국인을 석방했던 과정에서의 미국 특사 파견이 그 전례다. 북한은 1996년 8월 음주 상태에서 압록강을 넘어온 미국인 에반 헌치커나 94년 12월 비행 착오로 월경한 주한미군 헬기 조종사 보비 홀 준위를 각각 3개월, 10여 일 억류했다가 추방했다. 당시 모두 빌 리처드슨 미 하원의원이 특사로 평양을 찾아 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여기자들이 소속된 커런트TV의 공동 설립자인 앨 고어 전 부통령이나 ‘석방 해결사’인 빌 리처드슨 전 의원이 이번에도 물밑 협상을 통해 특사로 갈 가능성이 거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한 외교 소식통은 “가장 큰 변수는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중국을 압박해 강력한 대북 제재를 추진하는 시점에서 미국이 자국민 문제로 북한과 ‘주고받는 딜’을 시도하는 것은 국제 공조에 부담을 준다는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이미 미국 유력 인사의 방북이 실현돼도 임무는 ‘인도적 차원’에 국한될 것이라고 예고해 여기자 문제와 북핵 문제의 분리 대응을 예고했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여기자 석방을 위한 북·미 협상이 진행돼도 미국으로선 북한에 당장 줄 ‘현찰’은 없고 향후 북·미 관계의 개선 가능성에 대한 ‘어음’ 정도나 가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이 미국 입장을 타진한 뒤 자신들이 바라는 수위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 있는 만큼 결국은 북한의 선택에 달렸다는 것이다.

◆북한, 억류 남측 직원 ‘대남 카드’ 삼을 수도=일각에선 “북한이 미 여기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해 대미 카드로 활용하려 한다면 억류 중인 남측 직원 유모씨 역시 쉽사리 풀어주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북한이 미국 여기자 문제의 결말을 지을 때까지 남측 억류 인원 문제는 뒤로 돌릴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채병건 기자

◆조선민족적대죄,비법국경출입죄=북한 형법엔 ‘다른 나라 사람이 조선 민족을 적대시할 목적으로 조선 사람의 인신·재산을 침해하거나 민족적 불화를 일으켰을 때 5∼10년 노동교화형에 처한다’고 돼 있다. 비법국경출입죄는 ‘불법으로 국경을 넘나든 자는 2년 이하의 노동단련형 또는 3년 이하의 노동교화형에 처한다’고 명시돼 있다.

◆노동교화형=범죄자를 교화소(교도소)에 가두고 노동을 시키는 형벌. 유기교화형은 1년부터 15년까지며 다른 범죄와 합산해도 최고 15년을 넘길 수 없도록 북한 형법은 규정하고 있다. 범죄자의 구속 기간은 형집행 기간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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