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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청론]알뜰시장에 숨쉬는 '건강한 경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주말에 탄천의 알뜰시장에 나가본다. 복닥거리는 장터에는 한푼이라도 더 싼 물건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붐빈다. 그 틈서리에서 나는 IMF를 맞은 우리경제의 그늘을 본다.

알뜰시장은 벼룩시장이라고도 한다. 벼룩시장이란 불어로 마르셰 오푸세에서 유래한다. 왜 하필 '벼룩' 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경찰이 단속을 나오면 감쪽같이 없어졌다 다시 나타나는 무허가 노점상의 모습이 마치 벼룩이 튀는 것같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 벼룩시장이 영어로는 프리 마켓이다. 우리의 5일장처럼 주말이면 상인들이 공터에 몰려와 차일을 치고 좌판을 벌이는 곳이다.

프랑스에는 또 브로캉트 (brocante) 라는 것이 있다. 마을단위로 일년에 한 번 정도 축제를 겸해 열리는 중고품시장이다. 또 비슷한 것으로 미국에는 개라지 (차고) 세일이 있고 영국에는 부트세일이 있다.

이런 시장은 대개 주차장같은 공터에서 열리는데 누구나 자리세만 내면 장사를 할 수 있다. 손잡이가 떨어진 주전자, 고물 시계, 유행이 지난 헌 구두, 할머니가 소녀때 읽었음직한 동화책등이 주종품목이다.

영국에서는 오래된 것일수록 값이 나간다. 낡은 것도 고쳐 쓰는게 일종의 전통처럼 돼있다. 무슨 물건이든 쉽게 버리는 법이 없다. 갈고 닦아서 광이나면 값을 더 쳐준다. 이런 사회분위기가 중고품을 교환하는 다양한 시스팀으로 발전했다.

부정기시장인 부트세일 이외에 상설 중고품 전문상점도 많다. 런던의 포토벨리거리는 이런 중고품가게들로 이루어진 시장이다. 이곳에서 영국사람들은 악세사리와 헌옷을 사서 자기취향에 맞게 고치기도 하고 짝이 안맞는 가구를 천갈이해서 쓰기도 한다.

유럽사람들의 절약정신은 중고품 애호풍조에서 찾을 수 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를 물려가며 쓴다. 명문가에는 으레 고풍스럽고 연륜이 담긴 가구나 서적이 자랑거리다. 자동차의 평균사용기간도 우리보다 길고, 중고차라도 제값을 쳐준다.

이에비해 우리는 너무 쉽게 버리고 유행에 민감한 것은 아닐까. 자동차.냉장고.텔리비전을 가리지 않고 새 모델만 나오면 멀쩡한 것을 두고 새것만 찾는다.

우리도 아끼고 절약하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전에 열린 조각가 이승윤씨의 인형전 '옛날 옛적에' 는 진한 감동을 주었다. 몽당연필을 붓대롱에 끼어쓰는 아이들, 도시락을 자갈탄 난로에 덥히는 모습, 호롱불밑에서 양말을 꿰매는 어머니의 피곤한 모습. 모두 정답고 뭉클하다.

그 때는 생활자체가 절약이었다. 우리가 가난했던 과거를 감상적으로 회상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런 어려운 시절을 용케 해쳐왔다는 자부심도 있다.

그런데 어느새 좀 살만하게 됐다고 어려웠던 시절을 과거 저편으로 밀어놓고 과소비풍조에 빠져 버렸다. 골프채.위스키.고급화장품등 세계유명메이커들에게 우리는 봉이었다.

적당한 소비와 위락은 경제의 활력소지만 사치성.과시형 낭비는 악덕이다. 경제할자 톨스타인 베블렌은 '유한계급론' 에서 유한계급들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과시적 소비를 일삼는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우리는 소득 6천달러수준을 1만달러로 착각하고 유한계급 흉내를 낸 것은 아닐까. 알뜰시장에 나가보자. 아직은 조잡하고 어수선한 풍경이지만 휘황하고 번쩍거리던 거품경제에 비하면 오히려 건강해 보인다. 이제 새로운 소비문화, 건전한 장터문화가 자리잡아야 한다.

이건영 〈교통개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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