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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시아 구상’ … 아세안 다음은 인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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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20세기에는 두 번의 세계사적 대전환기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약 25년이 첫 번째 전환기였다면 두 번째 전환기는 베를린 장벽과 소비에트 블록이 무너지면서 냉전이 종식된 1990년 전후 약 10년이었다. 첫 번째 전환기를 거치며 세계질서의 중심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갔다. 자유와 공산 진영으로 양분된 전후(戰後) 세계질서는 두 번째 전환기 동안 유일 초강대국 미국 중심의 일극(一極)체제로 신속하게 재편됐다. 21세기의 문턱을 넘은 지금, 세계는 또다시 역사의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9·11 테러가 신호탄이었다. 알카에다의 상상을 초월한 테러는 ‘아메리카 제국’의 오만에 대한 경고로 읽힐 수도 있었지만 미국의 리더십은 성찰이 부족했다.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라크로 분노의 물줄기를 뿜어댔고, 결국 스스로 진흙탕에 빠지고 말았다. 미국 금융패권의 상징이었던 리먼 브러더스가 종이로 만든 집처럼 맥없이 쓰러지면서 워싱턴 중심 세계체제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중국·브라질·인도·한국 등 신흥경제국들이 대거 포진한 주요 20개국(G20) 회의체는 전환기의 세계질서를 대변하고 있다.  

과도기적 세계질서에서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아시아의 부상이다. 한·중·일 3국과 인도·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5개 국가가 G20에 포함돼 있다.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3(한·중·일)’는 전 세계 인구의 35%, 국내총생산(GDP)과 교역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전환기를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영어 표현으로 ‘아웃 오브 박스 팅킹(out-of-box thinking)’이다. 얼마나 창조적이고, 넓고 멀리 내다보는 비전과 통찰을 가졌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은 180도 달라진다. 19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세계사적 전환기에서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아시아 최초로 부국강병에 성공한 나라가 됐다.

21세기의 첫 전환기에서 한국의 선택은 무엇인가. 네트워킹이다. 즉 그물망 짜기다. 경제, 군사·안보, 문화, 과학 등 다방면에 걸쳐 겹겹이 그물망을 짜야 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정부가 보호주의를 배격하고, 자유무역협정(FTA)의 적극적 확대를 꾀하고 있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다. 미국 및 유럽연합(EU)과의 FTA가 마무리되면 한국은 칠레·아세안·싱가포르·유럽자유무역지대(EFTA) 등과 이미 맺고 있는 FTA와 더불어 교역과 투자에서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갖추게 된다.

이명박 정부가 ‘신아시아 구상’의 기치 아래 아세안과 관계 강화에 나선 것은 잘한 일이다. 지난주 제주에서 열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는 이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1200억 달러 규모의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CMIM) 기금’의 지분 구성에서 보듯이 ‘아세안+3’의 의사결정 구조에서 한국은 아세안과 힘을 합하지 않고서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돼 있다. 중국과 일본이 각각 32%, 아세안이 20%인데 비해 한국의 지분율은 16%에 불과하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아세안은 독자적인 캐스팅 보트를 쥘 수 있지만 한국은 안 되는 구조다. 한국은 아세안과 한편이 돼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 아세안과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이유다. 아세안에 대한 물량 공세로는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을 당할 수가 없다. ‘경제가 탄탄하고 문화가 매력적인 신뢰할 수 있는 중견국가’라는 이미지로 아세안에 다가서야 한다.

‘신아시아 구상’의 완성을 위해 아세안 다음으로 관계를 강화해야 할 나라는 인도다. 인도로 대표되는 서남아를 시야에 넣어야만 정부가 공을 들이고 있는 중앙아시아와 동남아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인도양을 건너 남태평양과도 이어질 수 있다. 11억 인구의 인도는 호주·뉴질랜드와 함께 이미 동아시아정상회의(EAS)의 회원국이다. 인도와 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새로운 아시아 질서에서 매우 중요한 포석이다. 인도는 21세기 중반, 중국과 아시아의 주도권을 다투게 될 나라다. 영어를 할 줄 아는 25세 미만의 젊은 층이 전체 인구의 50%인 인도는 중국이 당면하게 될 인구 고령화와는 거리가 먼 나라다. 성장잠재력이 중국보다 크다고 보는 이유다.  

이미 협상을 끝내고 서명만 남겨 놓고 있는 한·인도 간 ‘포괄적 경제 동반자 협정(CEPA)’을 하루 빨리 마무리 지어야 한다. CEPA는 이름만 다를 뿐 FTA와 동일하다. 이 대통령은 올 하반기 중 인도를 방문, 연임에 성공한 만모한 싱 총리와 CEPA에 직접 서명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한국 전용공단 조성 문제도 매듭지어야 한다. 한반도 통일의 비전을 위해서는 미국과 동맹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 못지않게 인도 같은 미래의 강대국을 후원 세력으로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중국과 일본이 소극적일 때 인도 같은 나라가 국제무대에서 목소리를 내주면 큰 힘이 될 것이다. 전환기에는 파천황(破天荒)의 사고가 필요하다. 글로벌 네트워킹을 통해 한반도 미래의 비전을 그리는 ‘그랜드 아키텍처(Grand Architecture)’가 절실한 시점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CMIM(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 기금=‘아세안+3(한·중·일)’재무장관 회의에서 합의된 역내 금융위기 예방 시스템으로, 기금 규모는 1200억 달러. 당초 금융 위기에 처한 국가에 대한 양자간 통화 스와프 방식으로 출발했으나 지난해 말 다자가 참여하는 집단 지원체제로 바뀌었다. 각국의 거시경제 상황을 상시적으로 체크하는 감시기구가 출범하면 장차 아시아판 국제통화기금(IMF)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