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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라의 재발견, 서민엔 믿음 주고 기득권층 설득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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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호 03면

룰라 대통령이 3년 전 상파울루를 방문한 이탈리아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연설하고 있다. 2002년 165억 달러였던 외국인 직접투자는 지난해 450억 달러로 늘었다. 중앙포토

브라질은 러시아·인도·중국과 함께 브릭스(BRICs)로 일컬어지며 세계 경제의 기관차 역할을 해왔다. 한국과 수교한 지 50년 되는 브라질은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64) 대통령이란 걸출한 지도자 덕택에 남미의 문제아에서 모범생으로 탈바꿈했다.

임기 1년 반 남기고 지지율 81% 신화

1일 현지 여론조사기관 CNT는 룰라의 지지율이 81%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역대 브라질 대통령 가운데 최고다. 2003년 집권 당시보다 지금 더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경제 안정을 이룩한 카르도주 전 대통령도 최절정이던 1996년의 지지율이 47%에 불과했다.

잔여 임기 1년여를 남긴 룰라를 둘러싸고 3선 출마설이 끊이지 않는다. 연임만 허용하는 헌법을 고치자는 개헌론까지 나온다.

세계 경제위기 속에서 브라질 역시 타격을 받고 있다. 지난해 4분기와 지난 1분기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추락했고 향후 전망도 불투명하다. 이런 악조건에서 지지율이 올라가는 ‘룰라 리더십’의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결과가 좋았다. 룰라는 성장과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취임 당시 12%였던 물가상승률은 4.5%로 낮아졌다. 수출은 네 배로 늘고 빈곤층이 줄어든 대신 중산층이 늘었다. 378억 달러(2002년)이던 외환보유액은 1900억 달러(4월 말 현재)를 넘는다.

행운도 따랐다. 원자재 가격의 급등은 ‘자원 부국’엔 축복이었다. 지난해엔 대형 해저유전이 발견됐다. 하지만 룰라의 ‘믿음의 정치’가 없었다면 경제 재도약은 어려웠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룰라의 인기에 대해 빈곤층 지원 프로그램(Bolsa Familia) 같은 포퓰리즘 복지제도를 꼽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룰라의 소통, 카리스마, 결단력이 없었다면 모든 것이 불가능했다는 주장에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언행일치의 리더십
룰라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지도자다. ‘서민 대통령’의 정체성을 잊지 않는다. 그는 빈민가 출신이고, 금속노조 위원장을 지냈으며, 노동자당(PT)을 창당했다. 18살에 기술 선반공으로 공장에 취업하기 전까지 거리에서 땅콩을 팔고 구두닦이를 했다. 전화교환원, 세탁소 점원도 했다. 어린 시절 꿈은 트럭 운전사였다. 그 후엔 유능한 선반공이 돼 비가 와도 물이 새지 않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3전4기 끝에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는 서민과 눈높이를 같이한다. 코린티안즈 축구팀의 열렬한 팬인 그는 시간만 나면 축구복 차림으로 불룩 튀어나온 배를 내밀고 그라운드를 달린다. 운동 후 맥주 한잔 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서민이다. 1억8000만 명의 브라질인은 대통령과 자신들을 동일시한다.

사실 국가 지도자 중 어린 시절 가난에 시달린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한 과거를 자랑스럽게 말할 뿐 지금의 생활태도나 행동은 달라져 있다.

룰라의 말과 행동은 정책으로 이어졌다. 2003년 집권과 동시에 빈곤층 생계수당 지급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가구당 월평균 5만원을 지급하는 제도다. 무려 1100만 가구가 각종 서민층 지원의 직접 혜택을 받는다. 이를 두고 야당에서는 돈으로 유권자를 매수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룰라는 “배부른 소리 하지 마라. 배고프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되받아쳤다. 이런 배짱과 솔직함이 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낸다. 빈부 격차가 심한 브라질에서 이 정책은 내수 시장 기반을 다지고 정치 안정을 유지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소통의 리더십
소통은 룰라의 가장 큰 강점이다. 그는 화술의 달인이고 설득의 귀재다. 어려운 말이나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지 않는다. 원하는 메시지를 쉬운 말로 정확하게 전달한다.

어느 장소에서든 마치 이웃에게 하듯 다정하게 말한다. 룰라의 말은 긍정적이다. 룰라의 소통 능력은 인내와 타협에 바탕하고 있다. 룰라는 집권 초 경제 정책을 수립하면서 파이를 나누느냐, 키우느냐를 놓고 고민했다. 그는 서민을 진정으로 위하는 것은 파이를 키우는 정책이라고 봤다. 긴축 재정과 고금리, 세수 증대와 연금 개혁, 노동자 복지혜택 축소를 추진했다. 노동자는 물론 기업들도 환영하지 않는 정책이었다. 반대파에 대한 설득은 룰라의 몫이었다. 룰라는 국민적 화합과 지지, 야당에 대한 설득 없이 정책을 추진하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先) 결정, 후(後) 협상·설득’의 원칙은 임기 내내 이어져 왔다. 룰라 스스로 “대통령의 덕목은 대화와 설득에 있다”고 말한다. 실무자들은 그런 대통령을 믿고 안심하고 정책을 펼친다.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룰라의 리더십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정부가 취한 조치에 의구심을 갖는 브라질 국민은 거의 없다. 룰라가 취한 정책은 개인에게 불편하더라도 브라질에 이익이 된다고 믿는 것이다.

결단의 리더십
“나는 전직 대통령들처럼 사임하거나 쫓겨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않을 것이다.”

룰라는 2005년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지지율은 급전직하했다. 2002년 대통령 당선 뒤 70%를 넘던 지지율은 30%대로 떨어졌다. 최초의 노동자 출신 대통령으로서 부패 척결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었으나 측근인 비서실장과 각료, 여당 의원들의 잇따른 부패 스캔들이 터졌기 때문이다. 룰라 가족도 수사선상에 올랐다. 정부 출자 전화회사가 대통령 아들 소유의 컴퓨터 게임업체에 거액을 투자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대학생들은 반정부 시위에 나섰고, 야당은 대통령 탄핵을 시도했다. 그는 위기에 굴하지 않았다.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며, 정치개혁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범죄가 있으면 친소 관계를 따지지 않고 유명 정치인이나 기업인·법조인 등을 줄줄이 감옥으로 보냈다. 성역은 더 이상 없다고 할 만큼 광범위하고 철저한 수사를 벌여 결과를 발표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고발이 있으면 철저하게 수사해 진실을 밝힐 것”이라는 약속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는 지난 6년간 ‘유전무죄’의 공식을 깨왔다.

룰라 리더십의 또 다른 특징은 결단의 카리스마다. 일단 결정하면 과감하게 행동에 옮긴다. 두 가지 사례가 있다. 2002년 그가 당선되자 증권시장은 혼란에 빠졌다. 주가가 급락하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는 시장 불안 심리를 잠재우기 위해 국제 금융계에 널리 알려진 야당 의원 메이렐리를 중앙은행장에 임명했다. 그는 지금도 룰라와 동고동락하며 경제 사령탑 역할을 하고 있다. 노동자당 내부에 급진 좌파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여당의 일부 의원이 룰라의 성장 위주 정책에 반대하며 반기를 들었다. 당내 갈등이 커지자 룰라는 급진 좌파를 출당시켜 당을 재정비했다. 룰라의 소통과 결단은 ‘룰라가 시작하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는 국민적 신뢰가 있기에 가능했다.

국민 氣를 살리는 리더십
룰라는 최근 미국 정부에 쿠바 경제 제재 조치를 해제하라고 촉구한다. 룰라는 3일 “쿠바는 더 이상 미주 대륙의 변방에 머물거나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브라질의 대국(大國) 면모를 과시하는 행보다.

지난달엔 중국을 방문해 양국 무역 거래 시 달러화 대신 자국 통화로 결제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남미 경제공동체 ‘메르코수르’를 강화하면서 지역 맹주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도 여전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4월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 그를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이라고 치켜세웠다. 차기 세계은행 총재로 룰라를 고려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남미 좌파정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3월 대선에서 승리한 엘살바도르 마우리시오 푸네스 대통령은 “룰라 대통령이 내 모델”이라며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었다. 룰라 대통령에 대한 호감은 브라질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로 이어지고 있다.

록스타를 방불케 하는 그의 인기는 브라질 국민의 자부심이다. 룰라는 취임 이후 “브라질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은 바로 당신, 브라질인” “브라질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는 주문을 끊임없이 외워왔다.

그런 룰라의 주문에 80% 넘는 브라질인들이 빠져 있다. ‘룰라 바이러스’에 행복해하고 있는 것이다.

룰라의 말말말

“어머니는 절대로 좌절하거나 기죽지 않았다. 항상 ‘좋았어. 모든 게 잘될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자서전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에서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나 자신만이 아닌 수백만, 수천만 사람들의 염원에 항상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003년 대통령 당선 뒤 한 인터뷰에서

“친구나 측근들로 정부를 구성하면 안 된다. 능력을 갖춘 사람을 골라 쓰는 것은 절반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어떤 자리에 앉히기는 쉽지만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기는 어렵다.”
-2006년 재선 뒤 전국 주지사 당선자 초청 오찬에서

“경제성장과 소득분배를 함께 개선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려 애썼다. 아무에게도 손해를 끼치지 않고, 아무도 모욕하지 않고, 누구와도 싸우지 않고 해낸 일이다.”
-지난 4월 뉴스위크 기자가 지지율 80%의 비결을 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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