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불안한 對일본 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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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과 일본이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것처럼 간단히 의견일치를 보는 게 있다. 과거극복이 두나라 모두에 이익이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방법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는 그 순간 양쪽 의견은 거의 흑백으로 갈린다.

한국의 통일후 동북아시아질서를 주제로 사흘 동안 하와이에서 열린 한.미.일 (韓.美.日) 안보포럼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의 신아시아질서연구소 (소장 李相禹.서강대교수) 와 미국의 퍼시픽 포럼, 그리고 일본의 오카자키연구소가 공동주최한 이번 포럼에는 한국에서 공노명 (孔魯明) 전외무장관을 포함한 젊은 학자들, 미국에서 도널드 그레그 전주한대사 등 안보전문가들, 일본에서 오카자키 히사히코 (岡崎久彦) 전태국주재대사 외에 외무성 국장과 자위대의 현역 및 퇴역장군들이 참석했다.

처음 이틀 동안 한국이 통일될 경우 한국과 미국, 미국과 일본의 안보관계가 어떻게 개편돼야 하고, 한.미.일 3각안보체제가 바람직하고 또 가능한 것인가를 토론할 때는 한국과 일본을 가르는 의견차는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날 한.일관계가 토론주제로 오르기 무섭게 오카자키를 선두로 일본측 참가자들이 한국의 과거집착을 비판하고 나섰다.

특히 오카자키는 한국이 언론자유가 없던 박정희 (朴正熙).전두환 (全斗煥) 시대에는 역사문제를 해결된 걸로 제쳐두고 있다 80년대초 중국이 역사문제를 거론하자 덩달아 과거문제를 살려냈다고 주장했다. 다른 일본참석자는 한국이 과거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한국 언론들이 판촉을 위해 한.일과거사를 선동적으로 재탕삼탕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측의 반박도 만만치 않았다. 한국과 일본이 충돌하고 미국이 심판을 보는 역사가 되풀이됐다.

한.일관계는 특히 김영삼 (金泳三) 정부 이래 후퇴를 거듭했다. 일본쪽의 잇따른 망언 (妄言)과 독도 및 어업문제로 휘청거리던 두 나라 관계는 95년 김영삼대통령이 일본사람들의 '버르장머리' 를 고쳐주겠다는 자극적 발언을 하는 서슬에 정권이 바뀌기 전에는 회복되기 어려운 지경까지 악화되고 말았다.

일본은 김영삼정부 말기에 한.일어업협정을 파기했다. 어업협정의 파기를 논의하는 국회에서 일.한의원연맹에 소속된 의원들도 반대발언을 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서 새 장관을 맞은 외무부 상층부에는 대일 (對日) 외교를 하는 데 일본어보다 영어 잘하는 사람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일기 시작해 어업협정 실무교섭의 책임자가 일본어 하는 사람에서 영어 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일본이 더욱 놀란 것은 총리출신 미국통이 주미대사에 임명될 때 일본통도 아니고 일본과 특별한 인연이 없는 사람이 주일대사에 임명된 것이다. 서울의 어느 일본특파원은 새 대사가 "일본의 시야에 없던 뜻밖의 인물" 이라고 평했다. 외무장관을 지낸 소식통은 일본정부가 새 대사 내정자에 대한 아그레망을 요청한 지 하루만에 보낸 것은 의도적으로 성의를 보이지 않은 것으로 해석했다.

이렇게 한.일관계가 후퇴하는데 두 나라간에 마땅한 대화채널이 없다. 과거에는 총리들의 사부 (師父) 라던 야스오카 마사히로 (安岡正篤) 나 재계거물 세지마 류조 (瀨島龍三) 등이 한국을 도왔다. 그러나 일본소식통은 지금 한.일간 대화채널이 막혀 있다고 걱정했다.

친한파로 통하는 다케시타 노보루 (竹下登) 전총리도 어업협정 파기를 배후조종하고는 외무차관을 한국에 보내 타협안을 제시했다 거부당한 후 한.일관계에 의욕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관계도 특수관계에서 보통관계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1백여명의 위안부 문제가 한.일관계의 한복판에 있는 건 비정상이다. 일본에 그대들이 가해자니까 "이리 오너라" 하는 식의 양반외교로는 21세기의 도전을 당할 수 없다. 지일 (知日) 인사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 金대통령 주변의 실세가 나서 대화의 물꼬를 트는 일이 중요하다.

김영희 〈국제문제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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