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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의 하늘' 은 어떤 표정이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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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하늘도 무심하십니다" "하늘이 두렵지 않으냐"

우리는 툭하면 하늘을 쳐든다. 왜일까. 답은 간단하다. 하늘을 눈보다 마음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에서 하늘은 단순히 공간이 아니다. 천하만물을 주재하는 절대자로서 늘 함께하는 심격을 갖는 존재이다. 하지만 워낙 천변만화한다.

하늘의 이 같은 다이내믹한 표정이 바로 '천문(天文)'이다. 이 때문에 하늘의 대리인임을 자처하는 지상의 권력, 즉 천자나 왕은 물론 학자와 일반 민초들에 이르기까지 문법은 각기 다를지언정 항시 천문을 읽어내고자 애를 썼다.


삼각산 문수암 비구니 선화자(仙化子)가 이태산(李太山)등 시주자 10명과 함께 1652년 공양물로 만든 보물 제1373호 '금동천문도(통도사 성보박물관소장)'. 지름 40㎝의 금동판 앞면(左)에 전통 별자리인 28수를 구멍뚫기 방식으로 새긴 다음 별 하나마다 진주를 박았으며 뒷면엔 수미산과 삼십삼천의 이름을 새겨 현상과 이상의 하늘을 한 곳에 담았다.

특히 왕의 경우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부실하면, 즉 천(天).인(人).지(地)를 제대로 아우르지 못하면 하늘이 재이(災異)를 통해 경고한다고 믿어 하늘의 뜻을 헤아리고자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백제의 천문박사, 신라의 일관 같은 관직과 고려의 서운관, 조선의 관상감 등의 조직이 그 증거다. 또 하늘을 우러르는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세종 때 관상감의 인원을 120여명이나 두고, 우두머리(관상감정)가 정3품임에도 불구하고 영의정으로 하여금 총괄토록 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천문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한 각종 관측기기와 각종 천문도 및 서적 등이 관의 주도로 제작되었다.

하늘을 궁리하기는 학자들도 마찬가지. 세상만물에 정신적 가치와 원리를 부여했던 게 이 땅의 정신을 지배했던 유학이고 보면 그 근원과 표준은 하늘일 수밖에 없었으니 그 이치를 깨달아 인간과 사회에 적용키 위한 노력이 치열했다. 이 같은 노력의 상징적 결과물이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퇴계와 정지운(鄭之雲.1509~1561)이 각각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그림으로 풀이한 천명도(天命圖)다.

어디 그뿐이랴. 민간에선 하늘이 의탁대상이라기보다는 아예 삶 자체였다. 별밭 아래 정화수를 떠놓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대는 할머니, 칠성각에 머리를 조아리는 어머니, 죽어서도 칠성판에 눕고야마는 할아버지, 아버지….

국립민속박물관(관장 김홍남)이 지난 14일부터 다음달 23일까지 열고있는 '천문'특별전은 이같이 다양한 '조상들의 하늘'을 1백여점의 유물들을 동원해 잘 담아내고 있다.

전시품엔 고구려의 천문도를 이어받아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서양식 천문도인 신법천문도를 길이 4.4m 병풍에 함께 그린 '신구법천문도(보물 1318호)', 낮밤 모두 시간측정이 가능한 관측기구 '일성정시의', 하늘의 대리인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병', 화엄의 세계관을 담은 '금동천문도(보물1373호)' 등이 있다.

이만훈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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