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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터·복사 누가 했는지 회사는 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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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선 아침에 출근해 자신의 데스크톱 PC가 잠긴 걸 보고 밤새 해직된 줄 알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곳의 교민 최모(47·회사원)씨는 “심지어 해고된지도 모른 채 출근하는 직원들을 회사 정문에서 경비원들이 되돌려보내는 장면을 얼마 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원체 정리해고가 잦은 미국이지만 신기술과 첨단 비즈니스모델 보호에 민감한 하이테크 정보기술(IT) 업종의 보안의식은 이처럼 비정한 살풍경을 빚어낼 정도로 투철하다.

불경기다 구조조정이다 해서 감원이 늘어나는 우리나라도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해직·이직자들을 통한 회사 기밀 유출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대기업과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번지고 있다.

현대백화점 그룹은 주요 계열사들이 공유하는 고객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문서보안시스템을 지난달 한층 강화했다. IT사업부의 양성수 부장은 “다이렉트메일(DM)이나 청구서 발송에 필요한 고객 DB를 관리하는 우리 입장에서 최근 정유·통신 등 다른 업종에서 심심찮게 벌어지는 고객 정보 대량 유출 사건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말했다.

NHN서비스는 디지털 정보 유통의 각 단계마다 보안을 강화하는 작업을 연말까지 벌이고 있다. 임직원 PC로 작성·관리되는 모든 문서를 자동으로 암호화하고, 프린터로 출력되는 문서의 활용 내역을 추적하는 시스템을 갖추기로 했다. 자동차 관련 종합 마케팅 회사인 GS넥스테이션은 허가된 사용자에 의한 개인정보 무단 사용 유출을 막는 솔루션을 지난달 도입했다.

삼성중공업·한국조폐공사는 이와 유사한 문서보안시스템을 지난해 도입한 회사들. 삼성중공업은 전·현직 근로자, 협력업체, 해외 선주 등을 통해 핵심 기밀이 중국 등지로 유출될 가능성에 대비해 ‘설계도면(CAD) 보안 솔루션’을 도입했다.

미국의 컴퓨터 보안업체 시만텍이 지난해 미국 내 퇴직자 1000여 명을 상대로 한 최근 조사 결과가 의미심장하다. 응답자의 59%가 다니던 직장의 고객 리스트나 직원정보 등 회사 정보를 어떤 형태로든 지니고 나왔다는 것이다. 문서보안업체 파수닷컴의 이상민 상무는 “회사를 그만둔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세계적으로 실직자가 늘면서 다니던 조직의 핵심 정보를 빼가는 ‘생계형 정보유출’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염려 때문에 IT 투자는 전반적으로 위축되는 가운데 보안투자는 늘고 있다. 올해 우리나라 중앙부처 정보화 예산(3조1555억원)은 전년 대비 7.1% 줄었지만, 정보보호 예산(1742억원)은 8.4% 늘어난 것이 일례다. 많은 기업이 ‘보안’을 올해 경영 역점 항목의 상단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파수닷컴·소프트캠프·마크애니 같은 국내 보안솔루션 업체들도 덩달아 호황을 맞았다. 파수닷컴은 1분기에 당초 목표의 두 배 이상인 40억원의 수주실적을 올렸다. 국내 IT 전문 조사회사 KRG의 추산으론 국내 문서보안솔루션(DRM·Digital Rights Management) 시장 규모는 지난해 300여억원대에서 올해 400억원대로 급증할 전망이다.

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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