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아라리 난장 8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봉환이가 여인숙에 나타난 것은 이튿날 새벽이었다.그러나 지난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었다.그들은 해장국으로 전통을 지키고 있는 감미옥으로 가서 오랜만에 배를 든든하게 채웠다.지난밤의 잠자리가 어땠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선잠에서 깨어난 아이처럼 상판이 사뭇 찌뿌듯해 있던 봉환이는 태호를 눈짓해서 먼저 자리를 떴다.

봉환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변씨가 속쓰린 봉환의 처지를 두둔하는 것도 아니고 헐뜯는 것도 아닌 한마디를 흘렸다."봉환이 낭패 났는 걸. 승희를 만나고부터 결심을 고쳐가진 것 같기는 한데, 너무 늦은 것 같구먼 - .뿌려둔 씨앗에 싹이 나는 것이야 지가 무슨 재간으로 막겠어. 두고보면 알겠지만 계집질이라면, 나중에 돌아올 횡액은 생각않고 눈깔에 불을 켜고 들쑤시고 다녔던 게 큰 화근이었지. 장차 진부장 장꾼들이 봉환의 얼굴 보자면 어렵게 되겠는 걸. " 두 사람도 채비를 하고 식당을 나섰다.

먼저 나간 두 사람은 시동을 걸어두고 기다리고 있었다.곧장 월정사 쪽으로 차를 몰아 호텔 초입길에다 좌판을 벌였다.그들이 주문진에서 새롭게 마련해온 현수막에는 '향수' 라는 제목의 정지용의 시 전문이 게재되어 있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히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제목 그대로 기억 속에 잠자고 있는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킬만한 시구였다.

호텔 객실에서 바라보면, 약장수로 나선 장정 네 사람이 이제 막 좌판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그러나 옥산대의 휘닉스파크에서처럼 일시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낌새는 아니었다.태호의 나간다 타령이 시작되면서도 몇 사람이 걸어나와 기웃거렸을 뿐이었다.그러나 철규가 그 여자를 만난 곳이 좌판을 펴고난 뒤 두시간 쯤 흘러갔을 무렵이었다.

옷차림이 수수한 여자가 조용히 난전으로 다가섰지만 매기 (買氣)가 없었던 시각이었으므로 그들의 시선을 끌지는 못했었다.세끼니 정도 식탁에 올릴만한 씀바귀와 냉이를 사들고 난 뒤에도 냉큼 뒤돌아서지 않고 좌판 주변을 맴돌고 있을 때에야 철규는 그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의 모습이 전혀 낯설지는 않다는 것을 느꼈다.그러나 뚜렷한 기억을 떠올릴 수는 없었기에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그러나 흐트러진 좌판을 정돈하고 있던 철규에게 다가서며 먼저 말을 건넨 것은 그 여자였다."아저씨, 오늘은 고객들에게 커피 대접 안하시는가 봐요?" 한 마디를 떨군 여자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얼굴이 곱상스럽기보다는 이목구비의 윤곽이 뚜렷해서 오히려 남성적이라는 느낌이 강했지만, 유난히 흰 살결과 크고 검은 두 눈이 남성적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데 충분했다.

그러나 기억의 가닥이 잡히지 않아 막연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는데, 그녀가 덧붙였다."아마 보름전쯤 되겠네요. 읍내 장터에서 친구랑 커피 사준 거 기억하세요?" "아, 그랬군요. 이제야 기억 나네요. 그 땐 두 분이었지요? 그런데 그 때 같이 오셨던 다른 한 분 얼굴은 기억 납니다만?" "걘 원래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 "그런데, 여기 진부에 사세요? 잠시 쉬러 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네. 서울 올라 갔다가 나만 다시 내려 온 거예요. 여기에 벌여놓은 일이 있거든요.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