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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종수의 시시각각

구조조정 삼국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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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태평양 건너 일본에선 또 다른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간판 기업들이 줄줄이 적자로 돌아서면서 고강도 자구노력을 벌이고 있다. 닛산·혼다·소니 등이 대규모 감산과 감원에 나섰고, 반도체회사들은 합병을 모색하고 있다. 엔고와 경기침체의 연타를 맞은 기업들이 견디다 못해 스스로 제 몸에 메스를 들이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일본 기업들이 자발적인 구조조정에 나선 것은 작금의 경영악화가 일시적인 경기침체 탓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수출기업들은 세계적인 장기 호황의 끝자락에 설비를 잔뜩 늘렸다. 호황이 계속될 것으로 보고 공급능력을 크게 확대한 시점에 금융위기와 경기침체가 찾아왔다. 여기다 엔고까지 겹치자 더 이상 견딜 재간이 없어진 것이다. 공급과잉(수요부족)은 결국 몸집을 줄여서 해소하는 수밖에 없다. 운동이나 약물로 살을 빼기엔 너무 늦은 데다 버틸 시간이 별로 남질 않았다. 구조조정이란 고통스러운 수술요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러나 자발적인 구조조정은 세계적인 경쟁에 직면하고 있는 수출기업들에만 해당될 뿐이다. 일본의 내수기업들에 구조조정은 여전히 낯설고 먼 얘기다. 일본 정부는 경기를 부양한다는 명목으로 막대한 재정자금을 퍼부어 내수기업들의 부실을 감추고 덮기에 급급하다. 대기업은 물론이고 중소기업들마저 정부지원으로 쉽사리 연명할 수 있는데 굳이 피 흘려가며 구조조정에 나설 이유가 없다. 그러는 사이 기업의 부실은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쌓여가고 있다.

한국은 어떤가. 역시 자발적인 구조조정은 없었다. 경제위기로 직격탄을 맞은 건설·조선·해운 업체들은 정부가 채권은행들의 등을 떼밀어 억지로 구조조정 작업을 벌일 때까지 꼼짝 않고 버티다가 마지못해 재무구조 개선약정을 받아들였다. 그나마 정부가 독려의 채찍을 휘둘렀기에 망정이지 그냥 놔뒀으면 기업 부실이 고스란히 금융권 부실로 넘어올 뻔했다. 대기업 구조조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과도한 사업확장으로 재무상태가 악화된 일부 대기업 그룹을 두고 유동성 위기설이 심심찮게 불거지는 와중에도 자발적인 구조조정에 나섰다는 기업은 한두 곳에 불과했다. 결국 정부 당국자가 몇 차례 엄중한 경고를 날린 뒤에야 겨우 대기업 9곳의 구조조정이 시작될 수 있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정부가 기업의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방식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물다.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구조조정을 할 의사가 없고, 당장 망할 지경에 이른 것도 아닌데 정부가 은행을 앞장세워 예방적인 구조조정을 압박하고 나섰으니 말이다.

미국은 GM의 사례에서 보듯, 기업이 스스로 구조조정을 못 하더라도 그냥 내버려 뒀다가 골병이 들고 난 후에 정부가 나선다. 일본에서는 수출기업들이 알아서 구조조정을 하지만, 내수기업들은 구조조정에서 아예 열외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기업더러 구조조정을 하라고 일일이 훈수를 두고 필요하면 으름장도 놓는다. 아직까지는 한국식 예방적 구조조정이 나름대로 비용도 덜 들고, 꽤 효과적인 것처럼 보인다. 외환위기 때 비싼 수업료를 물고 갈고닦은 구조조정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정부가 무한정 민간기업의 경영실패의 뒤치다꺼리를 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제는 기업이 자신의 몸 관리는 스스로 할 때도 됐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