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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無知無罪論' 허와 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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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경제정책 결정자들이 위기 보고를 늦춰 대통령 주도 아래 범정부적 차원에서 사태를 수습할 기회를 놓쳤다." 지난주말 발표된 감사원의 환란 (換亂) 특별감사 결과에 언급된 대통령 관련 대목이다.김영삼 (金泳三) 전대통령에 대한 책임문제는 밝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직접 감사에 나섰던 감사관들은 "무지는 죄가 안된다 (無知無罪)" 는 말로 YS가 상황파악과 사태수습을 못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했다.대통령의 통치행위는 감사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법적 해석이 있을 뿐이지 통치권자로서 국가위기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관계 감사관들은 "경제관료들이 '달러가 모자란다' 고 말해야 대통령이 외환위기의 의미를 이해했다" 고 전한다.실제로 보고서를 찬찬히 뜯어보면 감사원이 YS의 책임을 조심스럽게 언급했음을 알 수 있다.

감사원은 "기아사태 방치로 한국정부의 능력에 대한 불신을 가져오게 해 외환위기를 급진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며 지난해 7월 중순 이후 무디스사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S&P) 사의 신용등급이 급락한 점을 들었다.

당시 '국민기업' 으로 포장된 기아를 살려야 한다는 여론과 국민감정에 끌려다녔던 정부와 정치권의 무소신을 우회 지적한 부분이다.감사원 관계자는 특감 결과를 발표한 뒤 "당연히 부도처리나 법정관리뒤 제3자 인수절차를 밟았어야 했다.

당시 여론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결단할 수 있던 정책결정자는 대통령밖에 없었다" 는 소회를 피력했다.감사원 보고서에는 '세계화' 정책도 언급돼 있다.

갑작스러운 해외유학.해외부동산 취득한도 제한완화 등의 정책이 무분별하게 도입되면서 무역수지 적자누적에 한몫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에게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은 참모들에게 직무유기의 책임이 있다면 그렇게 될 때까지 듣기 좋은 말만 믿으면서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대통령에게 더 큰 '책임' 이 있다.더구나 국가 장래를 위해 국민감정을 거슬러야 할 때 거스르지 못하거나 즉흥적.근시안적 정책으로 외환관리에 어려움을 가중시켰다면 그것 또한 책임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책임을 언급할 때 반드시 지적돼야 할 부분이 있다.대한민국 국민, 우리들 자신이다.인기에 급급해 하는 YS를 더 독선에 빠지게 만든 상당부분의 책임은 떼밀수 없는 것이다.

감사원은 96년에만 1백60억달러에 이르렀던 소비재수입 등 과소비를 환란의 원인 (遠因) 으로 지적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대통령의 책임은 분명하지만 이를 조장하는 데 일조한 국민들의 정서도 분명히 포함돼야 한다.

金전대통령의 실패는 여론정치의 한계가 어떤 것인지도 보여준 값비싼 경험이라고 볼 수 있다.

채병건〈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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