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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아라리 난장 7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그래, 이상하겠지. 그런데 이번에 한 장도막을 같이 다니면서 생각했지. 난 동업자가 아니라, 동반자들을 만난 거라고. 물론 시작할 땐 나도 피동적으로 끌려간 쪽이었지. 노점상에 대해서는 지식도 없고 견문도 없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솔직한 심정으로 세 사람이 나더러, 넌 빠져 할까 봐 은근히 겁이 나, 우리 넷을 엮어준 것은 승희였고, 거기엔 굉장히 큰 덩어리를 포기한 희생이 따랐던 것도 짐작하고 있어. 그래서 난 승희를 포함해서 이 사람들이 좋아졌어, 이십년 가까이 살갗을 비벼가며 살았던 아내와는 쉽게 헤어졌던 내가 지금 우리들과는 그렇게 헤어질 수 없을 것 같아. "

"남녀가 사랑에 빠졌을 때, 여자는 남자에게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사이가 되기를 바란대요. 그러나 남자는 그와는 반대로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가 되기를 바란대요. 그런데 봉환씨와 나 사이는 또 그 반대예요.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길 원하고 있는데, 봉환씨는 그렇지가 않아요. 꾹 참으면서 듣고 있노라면, 발악이라도 하고싶을 정도로 말이 엄청 많아요. 말이 아니라 알맹이도 없는 말을 지절거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니까 그것도 엄청난 폭력이란 생각을 했어요. 봉환씨에 대해서는 제가 너무 예민하게 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

"욕구불만일 수도 있고, 승희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이탈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그럴 수도 있겠지. 우리끼리 있을 땐 말이 많은 것도 아니고 단순하지만 일에 대해선 전투적이야. 봉환이를 괄시하면 안돼. 우리 두 사람은 이렇게 바라만 보기로 해. "

승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긴 한숨소리를 들었다.철규는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그 손을 승희가 가만히 잡았다.바닷바람이 차가운데도 그녀의 손은 아직 따뜻했다.승희는 다른 한 손으로 철규의 허리를 껴안았다.그의 체온과 냄새가 느껴졌다.

철규라는 남자를 체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녀 자신의 가슴속에 괴어 있는 과거를 깡그리 씻어내지 못한 것에 원인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라는 것은 오랜 무덤에서 캐낸 토기의 무늬와 같은 것. 마음을 다잡아먹는다 해서 쉽사리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자기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것 때문에 번뇌하고 갈등하는 것이었다.

왜 이토록 매몰차지 못한 것일까. 달리는 열차의 차창 밖으로 놓쳐버린 손수건처럼 놓아버리면 그만인 사람들도 많다는데. 닫혀 있는 문을 맨손으로 치면서 여운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프고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이 사람을 멀리 떠나게 할 수는 없었다.그것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두 사람은 방파제 끝에서 오랫동안 나란히 서 있었다.철규의 입에서 이젠 돌아가자는 말이 흘러나올까 봐 승희는 두려웠다.그러다가 승희가 먼저 발길을 돌렸다.철규를 언덕 들머리길까지 배웅해주고 식당으로 돌아왔다.

식당의 술청은 그 사이에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바닥은 물로 씻어낸 것 같았고, 식탁들은 깨끗한 행주로 훔쳐낸 것 같았다.문을 안으로 잠그라는 봉환의 침착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방안에서 들려왔다.문단속을 끝낸 그녀는 조리대 옆을 지나 화장실 겸용으로 쓰고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옷을 벗었다.고개를 뒤로 젖혀야만 보이는 높이에 샤워기가 장착되어 있었다.수도꼭지를 비틀자, 물보라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그녀는 샤워기를 향해 얼굴을 쳐들었다.여자가 아름다워 보일 때는 여행중일 때, 그리고 잠들어 있을 때, 나머지는 목욕중일 때라는 말을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났다.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가 자신의 얼굴에 얼룩져 있던 눈물자국을 말끔히 지워줄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승희는 발가벗은 몸으로 물보라를 맞으며 오래도록 서 있었다.

맞은 편 벽에 걸려 있는 작은 거울이 물안개로 흐려지고 있었다.그녀는 알몸인 채로 술청으로 나가 찬장에서 가위 하나를 찾아들었다.그리고 다시 샤워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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