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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혁 칼럼]의석수보다 중요한 것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워싱턴 정치의 경험이 없는데다 선거과정에서 의회와 의원들을 신랄히 비판하기까지 했던 레이건 대통령은 민주당이 과반수를 장악한 여소야대 (與小野大) 의 의회와의 관계에서 매우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레이건은 의회문제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그는 당선 직후 의사당으로 의회지도자들을 예방했다.영향력있는 야당의원들을 백악관만찬에 초대했다.

야당총무 등 의회지도자들과 친분을 돈독히 했다.

자기정책에 유보적인 의원들에겐 몇번씩 전화를 걸었고, 백악관이나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 초청하곤 했다.그리고 그는 국민들에 대한 직접 호소로 의원들에게 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방법도 썼다.

이런 여러 가지 노력으로 레이건은 여소야대의 어려움을 무난히 극복할 수 있었다 (김충남. '성공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 에서) . 지금 우리 정치권에서는 정계개편 논의가 한창이다.현재의 여소야대 구도로는 원만한 국정운영이 안되니 정계개편이 불가피하다는 얘기가 여당에서 제기되고 이를 지지하는 여론이 높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실제 야대 (野大) 국회에서는 첫 내각의 총리인준안도 통과되지 않고, 정부조직개편.추경예산 등 뭐 한가지 새 정부 뜻대로 되지 못했다.미국과는 달리 국회의원이 소속당의 당론.당명 (黨命)에 묶이는 우리나라에선 확실히 여소야대에 문제가 많다.

그러나 여소야대도 문제지만 반대로 여대야소 (與大野小) 의 문제점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대통령이 총재인 집권당이 국회과반수를 장악하면 어김없이 국회는 통법부 (通法府).고무도장이 되고, 정당과 국회는 별 볼일 없는 존재가 됐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문민정부라는 YS정권때도 대통령이 혼자 차 (車)치고 포 (包)치고 다 했지 국회와 여야정당이 뭘했는가.

수없이 총리.장관을 갈아치워도, 공조직을 무시한 채 이들의 사조직이 국정을 요리해도 국회와 정당은 견제도 추궁도 하지 못했다. 지금 국민회의와 자민련 소속의원들의 개별적 입장으로는 한사람 한사람이 금싸라기 같은 현재의 소여 (小與) 시절이 더 행복할지 (?) 모른다.거여 (巨與)가 되고 나면 지시 하나로 통과시키던 과거 민자당이나 신한국당 신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여소 (與小)가 좋은지, 여대 (與大)가 좋은지 일률적인 정답은 없는 것이다.그리고 정계개편을 한다면 반드시 '모양' 이 갖춰져야 한다.

이념과는 거리가 먼 우리 정당들 사이에 이념에 따른 개편은 기대할 수도 없지만 최소한 정책이나 시국관의 동질성.근접성 (近接性) 이 개편의 바탕이 돼야 할 것이다.가령 내각제냐, 대통령제냐 하는 문제로 판을 새로 짠다면 그런 대로 모양이 갖춰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권력이나 돈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뤄지고 그 뒤에서 공작.회유.압력 따위의 현상이 작용한다면 그런 정계개편은 국민의 조소거리가 될 뿐이다.

YS정권이 문민개혁을 한다면서 선거법위반 피의자 등 약점을 가진 인사들을 끌어 모아 과반수를 확보했지만 그 과반수가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된 게 뭔가.

그렇지 않아도 지금 야당의원중 탈당 대상자로 지목되는 사람이 주로 선거법위반혐의로 걸려 있는 사람, 사업체가 곤경에 빠진 사람, 이권개입의 약점이 잡혀 있는 사람 등이라는 관측이 많고 또 그중에는 "내가 지금 이 나이에 어떻게 야당을 하나" 라는 한심한 만년 여당형 (型) 도 있다고 들린다. 이런 약점을 가진 사람이나 해바라기들로 여당몸집을 불린다고 여당이 강해질 수 있을까. 항간에는 북풍사건.감사원 특감 등이 모두 정계개편을 유발하는 야당의원 압박용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만일 여권이 정말 도덕성 없는 빼가기로 정계개편을 한다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밖에 안될 것이다.

의원영입을 하더라도 최소한 심사는 해야 할 것이다.선거법위반 피의자? 당신은 안돼. 이권개입 혐의가 있어? 당신도 안돼. 권위주의정권의 악역 (惡役) 출신? 귀하는 어려워…. 이런 정도의 기준이라도 적용돼야 영입의 명분이 설 것이다.

그리고 여소야대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니다.

레이건처럼 성실하게 극복해 나가는 노력과 국민지지를 받는 좋은 정치만 해나간다면 여소야대라 한들 정부.여당이 작지도 않으려니와 못해낼 일도 없을 것이다.

송진혁<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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