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영욕의 정보 최고책임자]'정권안보' 뒤안길 충성과 배반 두얼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국가정보책임자는 권력이동과정에서 청산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재임시절 무소불위의 실세 (實勢) 로 군림한 책임자일수록 권력을 놓은 뒤의 모습은 초라하다.

구속이 임박한 권영해 (權寧海) 전안기부장도 이런 부류에 속하게 됐다.

안기부장 혹은 중앙정보부장 출신으로 재판정에 섰던 사람들로는 6공의 이현우 (李賢雨) 부장, 5공의 유학성 (兪學聖).장세동 (張世東) 부장,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시절 김재규 (金載圭).김형욱 (金炯旭) 부장 (궐석재판) 등이다.

70년대의 이후락 (李厚洛) 부장은 그가 개입했던 정치공작의 불법성에 비춰 사법처리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선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초대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 (金鍾泌) 총리서리, 신직수 (申稙秀).노신영 (盧信永).박세직 (朴世直).서동권 (徐東權).김덕 (金悳) 전부장 등은 퇴임후에도 외풍을 맞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들. 각각 12대에 걸친 중정과 안기부장중 영욕의 교차폭이 가장 컸던 인물은 전두환 (全斗煥) 전대통령. 신군부의 권력장악 과정에서 3개월간 짧은 중정부장서리를 거친 뒤 대통령에 올랐으나 퇴임후 백담사유배, 2년간 영어의 몸이 돼야 했다.

법의 심판을 받은 부장들일수록 재임중 '정권안보' 를 위해 궤도를 이탈했다.

그나마 괜찮은 사후를 누리는 부장들은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비교적 금도 (襟度) 를 지켰다.

장세동 전부장은 역대 안기부장 출신중 유일한 호남인이다.

5공의 실세였고 충직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는 89년 5공비리 직권남용→93년 용팔이 (통일민주당 창당방해사건) 사건→96년 12.12사건 등 세차례에 걸쳐 구속됐다.

유학성 전부장은 김영삼 (金泳三) 정부 초기 사정의 표적이 되다 96년초 12.12로 구속됐다.

복역중 십이지장암으로 투병중 숨졌다.

6공의 이현우 전부장은 '대통령의 비자금' 관리를 주업무로 하다 쇠고랑을 찼고 5~6공의 가교역할을 했던 안무혁 (安武赫) 전부장도 비자금관련으로 불구속 재판을 받았다.

김재규 전부장은 朴대통령을 숨지게한 권력배반의 전형이었다.

최장수 부장이었던 김형욱씨도 그런 유형이었다.

그는 권력투쟁에서 몰리게 되자 미국으로 도주, 반정부운동을 벌이다 79년 10.26 직전 파리에서 실종됐다.

전영기·이상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