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풍에 날린 국정]북풍 사태의 본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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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의 극복이란 발등에 불은 뒷전으로 밀려난 채 '북풍공작' 사건이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북풍사건이 일파만파를 일으키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사회 지도층의 총체적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구 (舊) 여권과 신 (新) 여권, 안기부와 정치권의 '모자란' 합작품인 셈이다.

북풍사건의 본질은 대선을 여권에 유리하게 이끌어 보려했던 안기부가 북한의 대남 (對南) 공작에 휘말린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건이 정치권으로 확대되면서 여야 모두의 정략적 고려로 문제의 본질은 희석되고 정치쟁점으로 변질되고 있다.

그 와중에 국가정보기관의 권위.신뢰는 물론 국가 전체가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안기부의 공작문제가 새 정부에서 처음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지난 4일부터다.

국회 의원회관 주변에 대선 때 북풍공작에 개입한 안기부 간부들의 행적과 명단이 담긴 안기부 살생부 (殺生簿)가 유포되면서 비롯됐다.

안기부 내부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진 이 살생부는 새 정권의 안기부 개혁구상과 연결지어졌다.

이 시점이 의미를 갖는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4일은 이종찬 (李鍾贊) 안기부장이 취임 (5일) 하기 직전이었다.

따라서 이 살생부는 신임 李부장에 대한 새 정권 핵심세력의 압박용이라는 해석이 뒤따랐다.

또 이 시점은 지난 2일 국회에서 김종필 (金鍾泌) 총리 임명동의안 처리가 불발로 끝난 직후란 점에서 관심을 끈다.

시점의 미묘성으로 여소야대 (與小野大) 의 한계를 절감하고 거대야당을 흔들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정재문 (鄭在文).정형근 (鄭亨根) 의원 등 4~5명의 한나라당 의원들에 대한 '조사 및 사법처리 불가피론' 이 언론에 흘려졌다.

한나라당은 즉각 '표적사정' '정계개편 음모론' 을 제기하면서 북풍사건에 대한 국회 국정조사권 발동이란 카드로 반격에 나섰다.

정치쟁점화 방식을 통해 북풍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 한 것이다.

야당 공세에 부담을 느낀 여권은 결국 북풍 국정조사와 경제청문회를 묶어 6월 이후로 미루기로 한나라당과 타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가라앉는 듯 했던 북풍은 안기부 이대성 (李大成.구속) 전해외조정실장으로부터 '해외공작원 정보보고' 문건을 넘겨받은 국민회의 정대철 (鄭大哲) 부총재가 언론에 흘리면서 오히려 확산일로로 치달았다.

李전실장이 이 문건을 만든 배경은 아직 불분명하다.

다만 그가 鄭부총재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위협성 발언을 한 것은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흥정용이었을 수도 있다.

또 안기부를 대수술하려는 새 정권의 의도에 반발한 안기부내 기득권 세력의 조직적 대응의 일환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밀문건을 개인의 보신이나 파벌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도록 내버려둔 안기부 정보관리 시스템은 문제가 있다.

어떻든 이 문건이 유출, 공개됨으로써 李전실장 등의 의도는 어느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안기부 간부가 문건을 외부로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내부의 조직적 반발을 예상치 못하고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안기부의 신임 상층부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

여야의 정치적 계산과 안기부의 처리미숙, 여기에 정치인과 안기부 간부의 개인적 이해관계 계산 등이 뒤엉켜 나타난 것이 북풍사건의 전모다.

김두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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