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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명동극장, 그 뒤엔 팔순 노인의 20년 집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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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올해 연극계 최고 이슈는 단연 서울 명동 옛 국립극장의 복원이다. 다음달 5일, ‘명동예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문을 여는 명동 옛 국립극장의 부활에 원로 연극인들은 감격해했다. 그러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였다. “김장환 명동상가번영회장이 없었으면 복원은 불가능했다”고.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론 전혀 믿기지 않을 만큼 김장환 명동상가번영회장은 고왔고 씩씩했고 겸손했다. 복원되는 명동예술극장 앞에 선 그는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다면 시작도 안했을 것”이라면서도 "다음달 5일 개관일이 너무 기다려진다. 첫사랑을 다시 만난다 해도 이렇게 설렐까”라며 환하게 웃었다. [조문규 기자]


상가번영회장이라면, 따지고 보면 장사꾼 아닌가. 그런데 수많은 이들을 제치고 그가 왜 명동예술극장 복원의 일등 공신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일까.

◆예술이 상권을 살린다=김장환 회장은 1930년생이다. 명동상가번영회장이 된 건 82년이다. 그는 당시 한일관·우래옥·삼오정과 함께 서울의 4대 대형 음식점으로 손꼽히던 ‘이학’이라는 한식집을 68년부터 운영하고 있었다. 80년대 중반부터 일류 디자이너들의 매장들이 압구정동과 청담동으로 이동하면서 상권의 중심축은 확실히 명동에서 강남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명동의 땅값은 여전히 최고가를 기록했고, 주차공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악순환이었다. “돌파구가 절실했어요. 해외 사례를 들여다봤죠.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유서 깊은 도시일수록 역사적이고 기념이 될 만한 시설들을 가지고 있다는 거였죠. 명동도 더이상 상업지구만으론 발전이 안된다, 명동 국립극장의 복원만이 살길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죠.”

90년대 초반이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명동 옛 국립극장의 소유주인 대한종합금융에선 기존의 건물을 헐고 10층짜리 빌딩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김회장은 마음이 급해졌다. 95년 연극인·문인 등 70여 명과 함께 ‘명동 옛 국립극장 되찾기 운동’ 발기모임을 가졌다. 곧이어 국립극장 건물 해체를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놈의 입방정 때문에…”=김회장은 발품을 팔았다. 국회의원, 문화부 공무원, 서울시·중구청 관계자를 일일이 만나러 다녔다. 대부분 회의적이었다. 와중에 “장사꾼이 무슨 꿍꿍이가 있다”란 오해까지 받았다.

90년대 후반, 당시 고건 서울시장을 찾아가 “서울시에서 명동 옛 국립극장을 매입해 달라”고 청원했다. 얼마 뒤 서울시 고위층으로부터 “서울시에서 내년에 예산 500억원을 책정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뛸 듯이 기뻤다. 그래서 주변에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며칠 뒤, 소식을 전해준 고위 인사로부터 “왜 발설하고 다녔느냐”는 책망을 받았다. 소문을 전해 들은 예총 관계자가 시장을 방문해 “그런 돈 있으면 국립극장 되찾는 데 쓰지 말고, 중단된 예총회관을 건립해달라”고 항의했다는 것. 김 회장은 “내 입이 가벼운게 탈이었어. 조금만 신중했으면 일을 훨씬 앞당겨졌을 텐데…”라고 회고했다.

◆8번의 경매 유찰 작전=2002년 한국 방문의 해를 맞이해 복원 운동은 다시 탄력을 받았다. 김수환 추기경과 송월주 스님까지 참여한 ‘추진위원회’가 새롭게 발족했다. 100만인 서명 운동 등 여론전도 펼쳤다. 어렵사리 문화부와 예산처를 설득해 건물 매입에 400억원을 쓰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런데 또 다른 복병이 등장했다. 감정가가 예상가의 두배가 넘는 840억원으로 나왔다. 청천벽력이었다.

김 회장은 양동작전을 펼쳤다. 우선 경매 입찰을 관장하던 법원을 찾아가 “입찰을 명동극장 현장에서 실시해 달라. 그리고 유찰하면 재입찰을 최대한 짧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다음엔 명동 부동산 업자들을 단속했다. “아무한테도 소개해 주어서는 안 된다. 이건 문화재다. 정부가 사야한다. 엉뚱한 이에게 팔리면 명동 상권은 다 죽는다”고 비장하게 호소했다. 부동산 업소는 40여 군데다. 직원까지 합치면 14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을 김 회장은 일일이 챙겼다. 유찰할 때마다 값은 10%씩 떨어졌다. 5회정도 유찰하자 한두 명씩 이탈할 조짐이 보였다. 김 회장은 “그걸 사면 망한다”라는 역정보를 흘렸다. 마침내 8회 유찰끝에 값이 395억원이 되자 문화부가 계약을 했다.

이후에도 건폐율 문제, 안전진단 등의 문제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김 회장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명동의 낭만을 고스란히 담아온 옛 국립극장은 다음달 개관을 앞두고 있다. “이젠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이렇게 오래 걸리거라고는 저도 몰랐죠. 정말 제 자식 같아요.” 여든 살 노인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최민우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명동예술극장=이 공간은 본래 1934년 일본이 영화 전용관으로 건립한 바로크 양식 건축의 명치좌(明治座)였다. 해방후 시공관(市公館) 시절을 거쳐 62년 ‘명동국립극장’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한국 연극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73년 국립극장이 명동에서 장충동으로 이전하고, 75년 대한종합금융이 극장 건물을 매입함에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던 예술 공간은 34년 만에 명동예술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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