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리메이크곡이 뜬다는데…복제아닌 제2의 창작 아쉬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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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언젠가 이 노래를 꼭 리메이크해 음반을 내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어느날 차속에서 그 멜로디가 들리는 거예요. 순간 하늘이 노래지면서 죽고싶은 생각까지 들더군요. "

가요제작자 A씨는 80년 TBC '젊은이 가요제' 대상곡인 로커스트의 '하늘색 꿈' 을 리메이크해 한몫 잡을 꿈에 부풀어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곡인데다 워낙 선율이 좋고 곡색 (曲色) 이 깨끗해 빅히트할 것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올초 박지윤이란 여고생가수가 이 곡을 들고나오는 바람에 A씨의 '하늘색 꿈' 은 물거품이 됐다.

A씨는 요즘 그럴듯한 기성가요를 리메이크할 궁리에 바쁜 제작자중 한명에 불과하다.

음반 판매고가 97년 같은 기간의 30%선으로 급감, '빙하기' 를 맞은 가요계는 최소한의 흥행이 보장되는 리메이크곡에 목을 멘 듯 보인다.

올해 히트곡 리스트를 보면 확연하다.

새해 벽두 글로리아 게이너의 '아일 서바이브' 를 따서 부른 진주의 '난 괜찮아' 가 쏠쏠한 판매고를 올리더니 요즘은 박지윤의 '하늘색 꿈' 이 브라운관을 휩쓸고있다.

이어서 히트곡 대열로 발돋움중인 김장훈의 '나와 같다면' 역시 리메이크곡이다.

이동원이 작곡한 이 노래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박상태란 가수가 부른 애잔한 발라드다.

이 곡이 실린 김장훈의 신보 (4집) '발라드 포 티어스' 는 한곡만 빼고 8곡 모두 리메이크로 채워져있다.

특히 '햇빛 비추는 날' '내일로' 등 4곡은 김장훈이 1.2집에서 불렀던 '자기 노래' 다.

또 015B의 멤버 장호일이 자신의 이름으로 처음 낸 정규음반 역시 리메이크가 절반에 가깝다.

김건모가 벗님들의 '당신만이' 를 신보에 넣은 것이나 박상민이 3곡의 리메이크를 수록한 것은 차라리 애교스러워보인다.

93년 015B의 '슬픈 인연' 이 나미의 원곡을 뛰어넘는 빅히트를 기록한 이래 리메이크는 음반마다 한두곡씩 실리는 기본메뉴가 되어있다.

그러나 음반을 대표하는 머릿곡 (타이틀곡) 을 리메이크로 정하는 것이나 음반전체를 리메이크로 메우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재탕으로라도 살 길을 찾자' 는 가요계의 몸부림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리메이크는 경제적 이점이 상당하다.

인기작곡자의 신곡은 최고 7백만원까지 들지만 리메이크는 수십만원에 일단 제작 할 수 있다.

그러나 리메이크를 창작이 아닌 싸구려 재탕으로만 몰아붙이기는 어렵다.

잊혀졌거나 미처 대중의 심판을 받기전에 사라졌던 좋은 곡을 재발굴해 들려준다는 긍정적 측면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리메이크가 정착된 서구팝에서는 리메이크의 변종인 샘플링송까지 어엿한 장르로 자리잡고 있다.

다만 편곡이나 화성에서 개성있는 변용을 보여주지못하고 단순히 원곡에 분위기나 새롭게 덧입혀 내는 수준의 리메이크는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게 가요계의 중론이다.

리메이크 붐이 더욱 눈길을 끄는 대목은 옛날만큼 좋은 멜로디가 고갈된 가요계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요즘 신곡의 선율은 60~80년대 인기곡에 비해 빈약한 것이 많으며 그나마 괜찮은 곡들은 표절시비에 휘말리기 일쑤다.

이렇게 볼때 리메이크는 멜로디 위주 팝음악의 쇠퇴와 테크노같은 첨단 차세기 음악 사이에 자리잡은 과도기적 현상인 셈이다.

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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