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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민석 칼럼

글자 한 자가 빚은 ‘기부금 비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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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종종 글자 하나가 마술을 부리곤 한다. ‘A’와 ‘A 등’의 차이를 비교해 보자. ‘A’는 오직 A 하나만을 지칭하지만 ‘A 등’은 작게는 A하나에서부터 멀리는 무한대를 의미한다.

한 글자까지도 필요 없고, 받침 하나 혹은 모음 하나로도 마술이 가능하다.
대표적인 게 ‘임명권’과 ‘임면권’의 차이다. 고작 받침 하나가 다르지만 전자는 누군가에게 어떤 자리를 맡길 수 있는 권한이고, 후자는 자리를 맡길 뿐 아니라 자를 수도 있는 권한이다. 여야 정치협상에서 자주 거론되는 ‘합의한다’와 ‘협의한다’도 모양은 비슷해 보이나 전혀 다른 말이다.

요즘 논란이 되는 ㈜태양 송금조 회장과 부산대와의 305억원대 기부금 분쟁(중앙SUNDAY 5월 17일자 1, 5면)도 황당하게 글자 하나 때문에 시작된 싸움이다.

송금조 회장은 부산대에 305억원을 기부키로 한 것이 경남 양산의 제2 캠퍼스 부지대금이었다는 입장이지만 부산대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돈 준 사람이 “내 뜻대로 쓰이지 않았다”고 하는 데도 부산대가 이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는 송 회장 부부의 친필날인이 든 기부약정서다. 송 회장은 ‘캠퍼스 부지대금’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약정서에는 ‘캠퍼스 부지대금 및 연구기금’으로 돼 있는 게 사실이다.

‘캠퍼스 부지대금’과 ‘캠퍼스 부지대금 및~’. 하늘과 땅 차이다.
송 회장 측이 기부금을 내기로 한 취지가 경남 양산에 제2캠퍼스 부지를 매입하는 것이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우선 305억이란 숫자 자체가 그렇다. 당시 부산대와 토지공사 간의 복잡한 덧셈·뺄셈 과정을 거쳐 부족한 것으로 나타난 부지대금이 딱 305억원이었다. 만약 송 회장 측이 건물 신축 비용이나 학술연구비 같은 데 쓰라고 기부한 것이었다면 305억원이란 숫자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약정서는 그렇게 만들어졌을까. 송 회장 측 설명대로라면 양측이 ‘기부약정서’를 쓰는 날, 부산 대측이 ‘및’이라는 글자를 추가했다는 것이다. 기부약정서는 아무 때나 바로잡아 줄 수 있다면서…. 그러나 ‘및~’이라는 글자는 4년 동안 약정서에 남아 있었다.

부산대 총장이 “아버님처럼 모시겠다” “제사를 치러드리겠다”에서부터 “주요 언론에 송 회장의 일대기가 방영되도록 하겠다”면서 이른바 ‘예우서’를 써준 것도 송 회장이 친필 서명을 하는 데 작용했다.

‘주요 언론’이 부산대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어떻게 이런 예우를 약속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송 회장 부부는 이를 믿고 선뜻 친필날인을 해버렸다. 결국 기부자의 취지가 ‘제2캠퍼스 부지대금’이었음은 명확하지만 약정서상으로 꼭 거기에만 돈을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305억원 중 이미 건네 받은 195억원의 상당수를 다른 곳에 썼을지라도 부산대는 ‘법적으론’ 당당할 수 있다. 반대로 송 회장은 ‘죄’를 짓고 말았다. 지성의 보루라는 대학과 대학 수장을 ‘믿은 죄’ 말이다.

만약 송 회장이 죄를 짓고 싶지 않았다면 약정서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문구 하나, 받침 하나, 모음 하나, 마침표와 쉼표까지 살폈어야 했다. 대학총장이 ‘예우서’까지 주면서 어떤 약속을 해도 끄떡하지 말았어야 했다.

‘기부자가 맘 상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여론이 들끓기 시작할 때 부산대가 보인 모습은 더욱 안타깝다. 법원 1심 판결 후 “우리가 승리했다”는 식으로 ‘보도자료’를 뿌렸다.

최근 부산지방법원에 근무하는 현직 판사가 이 사건을 지켜보다 기자에게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기부자인 송 회장 부부나 국립 명문인 부산대 모두 이대로 가다간 큰 상처를 입고 말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결국 2심 법원이 ‘조정’에 나서 양측을 화해시켜야 한다”는 얘기였다.

기자 또한 똑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조정이 성립하려면 당사자들의 이의제기가 없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부산대가 기부금 사용내역을 공개해야 한다. 예컨대 ‘BK 대응비로 9억5000만원’을 썼다는 식으로 뭉뚱그려서 말할 게 아니라 ‘대응’을 어떻게 했는지 자세한 항목과 금액을 꼼꼼히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 평생 모은 돈을 낸 기부자가 “제대로 쓰긴 쓰고 있구나”라고 안심할 수 있다. 만약 잘못 쓴 부분이 있으면 깨끗이 사과해야 한다. 수재의연금으로 낸 돈은 수재의연금으로 써야 한다. 공무원 연수기금으로 써놓고 “좋은 데 쓴 건 똑같다”고 할 순 없는거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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