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운영 꿈 30대 주부가 4000만원 들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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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후 충남 보령시 동대동 ‘보령 햇살 작은 도서관’에서 김은정(여·왼쪽)-김범수 부부가 어린이들과 함께 책읽기를 하고 있다. 보령=프리랜서 김성태

21일 오후 2시 충남 보령시 동대동 ‘보령햇살 작은도서관’. 66.116㎡(20평) 이하 소규모 아파트 4000여 가구가 밀집해 있는 단지의 상가 3층 건물에 있다.

180㎡ 크기의 도서관 안 벽면 책꽂이에는 청소년용 책 6000여 권이 빼곡하다. 10여 개 테이블에서는 도서관장 김은정(39·여)씨와 자원봉사자 5∼6명이 초·중학생 10여 명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이날 읽은 책은 페트리시아 칼튼이 쓴 『민들레씨 날아오르다』. 김 관장은 “요즘 들판에서 볼 수 있는 민들레를 소개하기 위해 골랐다”고 말했다. 20여 쪽 분량의 책을 읽은 뒤 김 관장은 어린이들과 40여 분간 민들레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방과 후 햇살도서관에는 이런 광경이 규칙적으로 벌어진다. 햇살도서관은 김 관장이 사비 4000만원을 털어 2005년 3월 설립했다.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김 관장은 대전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1995년 보령으로 시집왔다. 이후 10년 동안 남편 김범수(47)씨와 함께 수퍼마켓을 운영했다.

수퍼를 운영하면서 저소득층이 많은 지역 어린이들이 도서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맞벌이 부부가 많아 어린이들이 갈 곳이 없었다. 소도시인 보령(인구 10만9000여 명)에는 어린이 전문 도서관이 한 곳도 없었다. 김 관장은 “어린 시절 독서습관이 평생을 좌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안타까운 심정에 어린이·청소년 전용 도서관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수퍼에서 일하며 2003년 독서지도사 자격증을 땄다. 남편은 “왜 사서 고생하려 하느냐”며 말렸다. 하지만 “도서관 운영이 소원”이라는 부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건물의 빈 공간을 임대해 도서관 간판을 걸고, 책 1600여 권을 구입해 비치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주민이나 학부모들을 상대로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현재 도서관 후원자는 70여 명. 일부는 도서관에서 책읽기와 동화구연 등 봉사를 해주고 십시일반으로 후원금도 기탁한다. 이 돈으로 매월 월세·책 구입비 200만원을 충당한다.

김 관장은 책 읽어주기 외에 영어회화·영화보기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토요일에는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 찾아가 어린이와 함께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눈다. 배송이(초등 4년)양은 “도서관에 오면 친구도 만나고 어른들이 재미있는 책도 읽어줘 시간 가는 줄 모른다”며 미소를 지었다. 김 관장은 “빌 게이츠처럼 햇살도서관을 찾는 아이들 중에서 멋진 인물이 나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보령=김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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