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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실은 KBS 'TV는 사랑을 싣고' 사연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8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겨울밤 하늘로 올라가/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김광규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중에서) 헤어질 때 우리의 모습은 그랬다.

그리고 18년 세월.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같은 시에서) 차라리 만나지 않고 그냥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는 게 나았을까.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희미한 자욱은 그리움으로 더욱 선연해진다.

KBS가 4년째 방영중인 'TV는 사랑을 싣고' 는 마음 한구석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를 찾아주는 프로그램이다.

인기인을 초대해 기억 한 조각을 단서로 기어코 꿈을 현실로 붙들어 온다.

이 프로의 포맷은 단순하다.

그렇지만 시청률이 상위권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시청자들의 공감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전 조각조각 흩어진 퍼즐을 되맞추는 게 어디 그리 쉽기만 하랴. 온갖 정성을 쏟았음에도 결국 브라운관에 담지 못하는 사연 또한 적지 않다.

운동선수 H.어렸을 적 여자친구를 찾고 싶어했다.

스태프들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서울 방배동의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

벨을 누르고 사정을 얘기했다.

인터폰을 타고 나온 음성은 싸늘했다.

"우리가 어떤 집안인지 몰라서 이러는 거예요?"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여자 탤런트 K.초등학교 때 남자친구를 수소문했다.

찾는 데까진 성공했는데 문제는 그의 애인이 '대단한 집' 따님이었다.

따님은 제작진에게 "만약 방영을 하겠다면 방송국 고위층을 통해 저지할 것" 이라는 경고를 보냈다.

프로의 성격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추억 복원의 가장 큰 적은 '권위주의' 라는 것이 제작진의 얘기다.

직종으로만 따진다면 교수가 가장 큰 암초. 영화감독 L,가수 J등이 옛사랑을 만나보겠다 했지만 교수가 돼있는 친구는 거절했다.

주부의 경우 괜한 구설수를 우려한 시부모.남편의 반대로 꺾이는 경우도 있다.

가끔은 아주 어이없는 일로 좌절한다.

인기 여가수 N.학창시절 노래를 병행했던 그녀는 "노래와 공부 중 하나만 선택하라" 며 꾸짖은 선생님을 만나고 싶었다.

알아보니 스승은 경쟁사인 MBC의 간부가 돼있었다.

김상근 책임프로듀서가 간곡히 청해봤지만, 그는 "어떻게 내가 KBS의 인기프로에 나갈 수 있겠느냐" 며 정중히 고사했다.

아나운서 K가 보고 싶어한 중학시절 남자친구는 알아보니 일찍이 탤런트 N의 초등학교 친구로 이 프로에 나왔던 서울대 의대생이었다.

미모의 여인 두명의 가슴속에 박혀있던 이 행운의 사내는 그러나, "같은 사람을 또 나오게 할 수 없다" 는 제작진의 판단에 따라 다시 스튜디오에 서진 못했다.

역시 가장 마음 아픈 장애물은 병과 죽음이다.

지금은 정치인이 된 J교수는 "가장 출중했던 제자" 를 그리워했다.

찾아보니 제자는 마음에 병이 들어 시골의 초라한 움막집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망자가 된 경우 사진 상봉을 하기도 하나, 대개는 그냥 가슴속에 묻는다.

출연이 무산되는 것 못지 않게 스태프를 괴롭히는 건 실패 사실을 전달하는 순간이다.

차마 상대방이 만나는 것을 원치않는다는 얘기를 전할 수 없어 대개는 "찾지 못했다" 고 말한다.

간혹 예외가 생긴다.

가수 C.옛사랑을 만나보고자 했으나 그도, 그의 집안도 너무 대단했다.

못 찾았다고 둘러댈 수도 없었다.

솔직하게 "그가 만나기 곤란해 한다" 고 말한 순간 그녀는 펑펑 울음을 쏟았다.

이런 얘기만 듣고 있으면 추억 찾기에 나설 엄두가 안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옛사랑은 그리 맥없이 스러지는 게 아니다.

대다수는 누군가, 그것도 유명인사가 자신을 오랫동안 그리워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워 반색을 한다.

설사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 섰어도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또 한 발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겨야 하는 삶이 되었어도 희미한 그림자를 움켜쥔 감격은 벅차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지 않은 좌절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가 오늘도 힘껏 달릴 수 있는 것이다.

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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