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5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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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시종 듣고 있기가 거북했던 철규가 손으로 변씨의 입을 가로막았다.

지난 대통령을 비난하는 말들이 흡사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비아냥거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철규의 만류로 시무룩해진 그들은 비로소 이불을 덮고 나란히 누웠다.

세 사람 모두가 난생 처음으로 노점상인으로 길을 나선 긴장감이 없지 않았다.

아침이면 햇살이 비쳐드는 창문으로 달빛이 다가와 어른거리고 있었다.

소문난 관광지인데도 사람의 발길이 뚝 끊어진 민박촌에는 개 짖는 소리만 공허했다.

그러나 변씨는 어느새 그의 특기인 코를 곯고 있었다.

봉환이가 낮은 목소리로 자느냐고 물었으나, 철규는 잠든 척하고 대꾸하지 않았다.

떨쳐버리자고 다짐하면 할수록,가슴 속으로 가라앉는 울적한 슬픔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과연 자신은 지금 삶의 중심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그 의심이 바로 자신이 느끼고 있는 슬픔의 정체였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월정사를 떠난 것은 이튿날 새벽이었다.

희검은 산주름이 겹겹으로 싸인 태백산 산록에선 7시가 되어야 아침해를 볼 수 있었다.

아직 여명의 기미조차 없는 밤길을 나선 용달차는 산굽이길을 돌 때마다 시야를 가로막는 겨울안개를 만나 주춤거렸다.

영동고속도로와 만나는 진부에 도착했을 때가 새벽 5시 반, 아직 해가 뜨려면, 한 시간 남짓 기다려야 했다.

고속도로를 타자고 채근하는 변씨를 달래어 국도로 들어섰다.

이상하게 서울과 직통으로 맞닿아 있는 길로 들어선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속도로와 사뭇 어깨를 나란히하고 누워 있는 국도를 따라 장평을 거쳐 봉평에 당도했을 때, 비로소 해뜰 시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이란 소설 제목을 간판이름으로 빌린 막국수집들이 자주 눈에 띄는 좁은 거리에 그들은 비로소 차를 멈추었다.

장이 선다는 이면도로로 가보았으나 그 곳이 장터골목이란 아무런 단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기웃거리던 세 사람은 추녀의 높이가 어깨에 와닿는 옥봉식당으로 들어섰다.

식탁이라곤 세 개뿐인 그 식당에선 해장국밥을 팔고 있었다.

깔끔한 인상을 주는 안주인에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예상하고 있었던 대로 봉평도 큰 장이 서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 곳도 물산이 흔전으로 나는 고장도 아니었고, 남쪽 해안지방처럼 햇나물이 나기 시작하는 계절이 오자면, 아직도 달포는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난로도 피우지 않은 썰렁한 술청에 앉아서 뜨거운 국물로 배를 채우고 있던 봉환이가 안주인을 뒤돌아보며 불쑥 물었다.

"아줌마요. 봉평에서는 메밀꽃이 언제 핍니껴?" "초가을에나 가서야 피지요" "메밀꽃이 우에 생겼지요?" "줄기는 붉지만, 꽃은 소금처럼 흰색이지요. " "뻘건 줄기 끝에 흰 꽃이 핀다카면, 메밀꽃도 상당히 섹시한 꽃이네요. 형님, 안 그래요?" 마주 앉았던 변씨가 개운찮은 눈발로 봉환을 흘겼다.

"이 사람은 아침부터 난데없는 색시타령이야? 벌써 객지에 왔다고 불두덩이 근질거리나?" "우리도 좌판을 펴놓고 봐야지요. " 얼추 오한을 달래고 식당을 나서려는데, 변씨가 보이지 않았다.

안주인과 허튼소리 몇 마디 주고 받는 사이에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장터골목 초입에 차를 몰고 가서 좌판을 벌여놓기까지 한 시간 이상이나 지체했는데도 변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좌판을 편 다음에 뒷건물 주인이란 남자가 나타나서 당장 난전을 거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들이 좌판을 벌인 자리는 장날마다 단골로 전을 펴는 공구 (工具) 상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은 장터골목 안쪽 주차장 들머리께로 좌판을 옮겨놓아야 했다.

펴놓았던 좌판을 다시 옮기는 곤욕을 치른 후에도 변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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