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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헌법이 지배하는 나라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김대중 (金大中) 정부는 개혁정부다.

이 말에는 나라를 제대로 세우기 위해 새 정부는 개혁을 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이 담겨 있고 국민의 열망과 기대가 담겨 있다.

그러나 대선후 공약이 줄줄이 파기되고, 헌법이 다반사로 무시되는 작금의 상황을 보노라면 또 개혁이라는 구호가 허위의식으로 전락하고 기대가 실망으로 되지 않을까 적잖이 걱정된다.

'개혁' '약속 파기' '헌법 위반' .이 세 낱말을 우리가 바라는 개혁정부에 맞추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이 낱말들을 모순되지 않게 맞추기란 불가능하다.

'약속 파기를 통한 개혁' '개혁을 위한 헌법 위반' '헌법 위반도 불사하는 개혁' 등등 아무리 맞춰보아도 말이 되지 않는다.

결국 이 낱말들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공직인사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며 내건 '인사청문회 실시' 와 '중앙인사위원회 설치' 라는 약속도 저버리고, 헌법이 허용하지 않는 대통령직속기관을 늘려 놓는 일이 어떻게 개혁과 부합하는지 이해하기 여간 어렵지 않다.

새 정부조직법을 기습적으로 공포해 사흘동안 국정공백을 초래한 사태와 국회의 동의절차를 무시하고 헌법이 인정하지 않는 '국무총리서리' 와 '감사원장서리' 를 임명하는 일을 강행하는 모습에서는 법학자로서 비통함을 느낀다.

국무총리 임명에 대한 국회의 동의를 놓고 표결이 진행됐음에도 그 결과가 여당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판을 깨버린다면 무엇 때문에 헌법이 필요하고 국회가 있어야 하는지 답하기 어렵다.

어떤 정치적인 수사를 둘러댄다고 하더라도 3월2일 국회에서 행해진 표결을 무효화할 수는 없고, 국무총리의 임명에 대한 동의 여부는 그 표결 결과에 따라 판가름날 뿐이다.

정치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대선 승리에 기여한 자민련과의 약속이행을 위해 특정인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려는 대통령의 입장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약속이행도 어디까지나 헌법과 법률이 인정하는 테두리내에서 가능한 것이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장.국무총리.감사원장.대법원장.대법관을 임명할 때 국회의 동의를 얻도록 정하고 있기 때문에 사전에 동의를 얻지 못하면 대통령에게 지명된 자라도 이런 직책을 수행할 수 없다.

'국무총리서리' 뿐 아니라 그 어떤 명칭으로도 국회 동의가 있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국무총리의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국무위원 임명에 대한 제청이나 법률안에 대한 부서, 국무회의 참석, 행정 각부 통할 등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다.

이런 행위를 하게 되면 위헌이고 무효다. 국회의 동의절차가 진행되는 동안은 기존의 국무총리가 업무를 계속해야 하고, 동의에서 부결되면 다른 사람을 지명해 다시 동의를 요청해야 한다.

곡학아세 (曲學阿世) 하지 않고 헌법 규정을 정직하게 해석하면 이런 점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고건 (高建) 총리로 하여금 국무위원을 제청케 해 새 장관을 임명한 것이 형식적 합법성은 획득했다 하더라도 국회 동의도 얻지 않고 헌법규정 어디에도 없는 명칭인 '국무총리서리' 와 '감사원장서리' 라는 직책을 만들어 임명한 행위는 명백한 위헌이다.

간단히 생각해 '헌법재판소장서리' '대법원장서리' '대법관서리' 들이 모여 재판을 한다고 상상해보라. 어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서는 당리당략과 정파적인 이해를 떠나야 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국민의 손으로 선출한 국민의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과거 독재정권 아래서 행해진 '국무총리서리' 라는 폐습을 위헌이라고 하여 한번도 '국무총리서리' 를 임명하지 않은 김영삼 (金泳三) 정부의 치적을 생각하면 이를 비판하고 나서는 새 정부의 좌표가 어디에 있는지 의심스럽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에서 특정인 한 사람 때문에 정부조직이 비틀리고 나라가 결딴나야 할 이유가 없다.

지금이라도 나라의 일을 생각하고 잘못된 헌정 (憲政) 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살고 백성이 산다.

정종섭 〈건국대 헌법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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