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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법관의 존재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법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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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이 사건의 법률적인 쟁점은 첫째, 신 대법관이 지방법원장 시절 소속 법관들에게 보낸 메일이 법원장으로서 할 수 있는 당연한 사법행정권의 행사냐 아니면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법원 내부로부터의 재판권의 독립성을 훼손한 월권행위냐 하는 것이다.

둘째, 신 대법관은 법원장 시절에 있었던 이 사건의 굴레를 짊어진 채 이용훈 대법원장의 제청을 받고 국회의 공개 청문회 절차를 거쳐 대통령의 임명을 받는 등 소정의 절차를 마치고 헌법상의 최고 가치판단 기관인 대법관이 된 사람인데, 하급법원 판사들이 집단적으로 그를 성토하면서 사퇴를 강요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재판권 침해의 여부에 대하여는 이 대법원장이 대법원 조사위원회와 윤리위원회의 의견을 종합하여 재판권을 훼손하였다는 판단과 함께 엄중히 경고했고 앞으로 재판권 침해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기 위하여 태스크 포스를 구성하겠다고 이미 약속을 했다. 신 대법관도 자기의 신중하지 못한 행정권 행사로 인하여 사법부에 누를 끼쳤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를 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신 대법관의 대법관 적격성에 대하여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던 사람이라도, 그가 헌법과 법률이 정한 소정의 절차를 거쳐 임명된 이상, 이제 법원장 시절에 짊어졌던 멍에는 청문회 등의 절차를 밟는 동안 충분히 걸러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반대하는 자에 대하여는 선거에서 당선되든, 적법한 절차에 의하여 임명되든 모조리 부정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법과 제도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법원의 판사회의도 원래 법관들의 사무분담에 관한 의견을 토의하는 극히 실무적인 회의이고, 상급법원 판사나 동료 판사의 업무수행에 대하여 가타부타 비판하는 곳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재판권 침해의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토의하고 건의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판권 독립을 주장할 때는 헌법을 금과옥조로 내세우면서 자기들의 위법한 집단행동이 헌법기관인 신 대법관의 업무수행 기능을 마비시키는 행위라는 것을 외면하고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한국병의 전형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인권을 탄압하던 독재정권의 시대도 아니고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에서 데모를 하던 시절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법 절차를 무시하고 자기들의 주장만 강변하는 포퓰리스트들이 사회를 혼란하게 하고 있는 이때에, 법원의 일부 판사가 법관회의에서 다룰 성질의 과제가 아닌 대법관 진퇴 문제를 치켜들고 위계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은 사법권의 독립을 지키겠다는 의도와는 달리 포퓰리스트들의 반법치적 행태로 평가되기 쉽다. 또 법관들의 그러한 행동은 사회의 다른 곳에서 본뜰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사법부의 지도층도 정치권력과 포퓰리즘의 도전을 의연하게 극복하고 사회의 균형 잡힌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후배들로부터 하극상을 당하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다.

이번 5차 사법파동을 주도한 판사들은 우리처럼 잦은 사법파동의 부끄러운 역사를 가진 나라가 또 있는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법관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국가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겸허하게 살펴보기 바란다. 그리고 혈기와 흑백논리의 잣대로만 매사를 재지 말고, 좀 더 성숙하고 균형 잡힌 혜안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성찰하는 지혜도 쌓아 나가기 바란다.

김인섭 법무법인 태평양 명예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