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그림값 구조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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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0년대 중반 동양화가 청전 (靑田) 이상범 (李相範) 은 당시 최고의 그림값을 받았다.

전지 한장이면 10만원, 반절이면 5만원을 호가했다.

그때 쌀 한 가마 값이 3천5백원 정도, 반절짜리 청전 그림 한폭을 사려면 쌀 14가마를 팔아야 했다.

그러나 90년 이후 1억2천만원으로 급등하면서 1백만원 월급쟁이가 10년치 월급을 고스란히 바쳐야 작품을 만질까 말까가 됐다.

서양화가 장욱진 (張旭鎭) 의 그림은 소품 위주여서 호당가격보다는 점당 가격으로 매겨졌다.

89년 12월 점당 1천만원이었던 장욱진 그림은 달마다 1천만원씩 올라 그가 타계한 90년 12월29일 직후 1억원이 됐다.

그림값은 서양에선 경매를 통해, 일본은 화상 (畵商) 교환회를 거쳐 대체로 결정된다.

우리 경우 작가가 정한 호당가격제다.

후기인상파 이후 서구에선 액자 제작에 맞춰 그림 크기를 세 가지 형태로 만들었다.

인물화는 세로가 긴 F형으로, 풍경화는 정방형의 P형으로, 바다를 그리기에 적합한 가로가 긴 M형으로 캔버스 크기를 제한했다.

여기에 일본은 그림 크기와 값의 함수관계를 도입했다.

엽서 크기 한장 (22.7×15.8㎝) 을 1호로 기준해 작품값을 매겼다.

일본식 합리주의랄까. 이 방식이 일제 때부터 우리나라에 도입돼 지금껏 사용되고 있다.

10호내 소품일 경우 2.3호의 차이가 불과 1.5㎝, 3.4호 차이가 1.4㎝밖에 되질 않는다.

호당가가 1천만원이면 가로 1.4㎝ 차이로 1천만원을 더 내야 하는 게 호당가격제다.

같은호당가격제지만 일본은 화상교환회라는 평가과정을 거친다.

화상간 교환회를 통해 작품을 평가하고 그에 따른 현금 매매가 이뤄진다.

공급자와 수요자간의 직거래가 아니라 도매상 연합회를 통해 가격을 결정한다.

우리 경우 초대전이 아닌 한 작가가 직접 값을 책정한다.

작품의 질과는 관계 없이 명성과 크기에 따라 부르는 게 값이라는 주먹구구식 그림값이 말썽의 소지가 돼 왔다.

국제통화기금 (IMF) 시대를 맞으면서 그림시장에도 구조조정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갤러리 현대가 '호당 가격없는 작품전' 을 내걸었다.

미술시장의 거품을 빼고 합리적인 그림값으로 수요자에 다가서자는 취지일 것이다.

이 작은 운동이 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는 큰 개혁으로 바뀌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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