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일본 한국계 기업들이 느끼는 외환위기 "돈 구하러 다니기 바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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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이 외채위기의 큰 고비를 넘겼다는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도쿄에서 위기의 최일선에 서있는 한국계 현지 법인들의 체감지수는 다르다.

"외환시장이 호전되고 있으나 수출 거래선을 찾아다닐 수가 없어요. 당장 일본 금융기관 들락거리기에 바쁩니다.

금융에 발목이 잡혀 있으니 수출을 늘릴래야 늘릴 수 없는 상황이죠. " 26일 오후 도쿄 프린스호텔에서 열린 주일 (駐日) 한국기업연합회의 특파원 간담회. 효성물산의 일본 현지법인 최철호 (崔哲鎬) 대표는 "일본 금융기관의 3월 결산 때까지는 대출선 유지를 위해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다" 고 하소연했다. 현지법인들은 이른바 '3월 위기설' 의 가공할 위력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외환위기가 일어난 뒤에도 현대.삼성등 대기업의 현지법인들은 도쿄 금융시장에서 한국의 시중 은행들보다 더 좋은 금리로 자금을 빌릴 수 있었다.

뉴욕 외채협상에서 타결된 금리보다 훨씬 낮은 '리보 (런던 금융기관간 금리)에다 0.37%의 가산금리' 만 얹어주고도 대출이 가능했다.

그러나 최근 도쿄미쓰비시은행은 한국의 금융기관.기업들에 대해 자체 신용평가를 끝내고 차등 금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현대의 경우 가산금리가 0.5%로 높아졌다.

현대 재팬의 최병일 (崔秉一) 사장은 "그나마 일본 금융기관들은 끝까지 의리를 지켜주고 있다" 고 평가했다.

런던이나 뉴욕에서는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해도 만기 연장에 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 효성의 崔대표는 "일본 기업들도 금융 경색으로 흑자 도산하는 마당에 한국 기업에만 선처를 호소할 수도 없다" 고 했다.

기업 관계자들은 현지법인의 외채규모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주거래 은행들에 충분히 보고했다" 고 말한 뒤 입을 닫았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한 달만 잘 버티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김정 (金正) 기업연합회장은 "일본 금융기관의 결산 시점만 넘기면 금융거래가 한층 쉬워질 것" 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마 (魔) 의 3월' 을 어떻게 버틸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모두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도쿄 =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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