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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 사랑 독차지한 ‘원조 국민여동생’ 하춘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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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여섯 살 때 독집 앨범을 낸 어린이가수 출신 하춘화. 그는 긴 가수활동 경력만큼 다양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500여 회에 달하는 개인공연, 최연소(6세) 독집 앨범 발표, 최연소(11세) 음반사 전속, 1971~77년 연속 MBC 10대 가수상 수상으로 한국 대중음악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됐다. 어린 나이에 데뷔했지만 중심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는 가수 하춘화의 족적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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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포털에서 조사한 설문조사는 흥미롭다. 총 3만5,934명의 응답 어린이 중 52%가 ‘장래 희망 1위’로 ‘가수’를 꼽은 것으로 나타났다. 요즘 어린이의 절반 이상이 가수의 꿈을 품고 있다는 결론인 셈이다. 그 영향일까?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어린이가수의 개체 수는 증가일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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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활동하는 어린이가수를 살펴보자. 우선 ‘리틀 소녀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깜찍한 9인조 꼬마그룹 ‘스위티’와 2004년 1집을 발표하고 방송·공연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선보이는 ‘7공주’는 현재 가장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어린이 보컬 팀이다.

10세 이하의 어린이 7명으로 구성된 ‘7공주’의 귀여운 노래는 휴대전화 벨소리, 통화연결음 분야에서 폭발적 인기를 모아 ‘컬러링 베이비’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트롯 신동으로 각광받는 어린이가수는 부지기수이고 ‘비틀스 신동’이라고 불리는 하영웅도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다.

분명한 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앙증맞게 노래 잘하는 어린이가수들은 언제나 ‘천재’ ‘신동’이라는 찬사 속에 대중의 주목을 한몸에 받아왔다는 사실이다.

이 분야에서 마이클 잭슨과 하춘화는 국내외적으로 독보적 존재다. 패밀리 그룹인 ‘잭슨5’ 시절부터 탁월한 가창력으로 세계 대중음악계를 주름잡았던 마이클 잭슨은 말이 필요 없는 어린이가수 출신이고, 하춘화 역시 국내 최초로 독집을 발표하며 한국 대중음악사가 기록할 각종 기록을 보유한 어린이가수 출신이다.

하춘화 이전에도 어린이가수가 전혀 없지는 않다. 1950년대 초 공식 데뷔하기 전이던 김시스터즈 자매가 미군을 상대로 노래를 시작했고, 미니스커트 가수로 유명한 윤복희는 물론 재일동포 어린이와 소녀로 구성된 렌자스 악단이 내한공연을 한 기록도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앨범 발표 시기로 보면 하춘화를 국내 최초의 어린이가수로 정의하는 데 이견의 여지는 없다.

동네의 꼬마 신동, 인기 스타가 되다

하춘화는 대중가요계에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1,500여 회에 달하는 개인공연, 최연소(6세) 독집 앨범 발표, 최연소(11세) 음반사 전속, 1971~77년 연속 MBC 10대가수상 수상 등 수백 회의 수상기록을 비롯해 2,500여 곡의 신곡 취입 등은 모두 그가 남긴 전인미답의 기록이다.

천부적으로 노래를 빨리 배우고 잘 불렀던 하춘화는 어린 시절 일본 방송을 통해 들은 미소라 히바리 등의 노래 제목을 적어 매일 불러달라던 고모들의 성화 속에서 성장했다. 그 바람에 서너 살 때 이미 200곡이 넘는 레퍼토리를 소화했다. 곧 동네에서도 소문난 꼬마 인기가수가 된 그는 이웃 미장원이나 양장점 언니들의 간청에 못 이겨 과자를 받고 노래를 불러주고는 했다.

고모를 따라 매일 극장쇼 구경을 다녔던 네 살짜리 하춘화의 우상은 당대의 꾀꼬리가수 박재란이었다. 머리를 위로 틀어 올린 박재란의 업스타일 공주머리를 보고 어린 하춘화는 똑같이 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공연 무대에 처음 오른 것은 만 다섯 살 때. 4·19 직후 부산 제5육군병원에서 부상 학생과 시민을 위한 위문공연이 그의 첫 무대다.

깜찍한 어린아이의 노래에 병원은 온통 난리가 났다. 때마침 이 광경을 지켜본 <부산일보> 기자가 ‘재롱둥이 천재 꼬마 탄생’이라는 제하의 기사로 신문에 소개했다. 1961년 서울로 올라온 그의 아버지는 남다른 음악 재능을 지닌 딸을 동화백화점(현 신세계)에 있던 동화예술학원으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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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당시 6살이었던 하춘화의 첫 공연 모습.

어린 아이의 방문에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던 작곡가 형석기는 어린 하춘화의 노래를 듣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1961년 6월 어느날 가요과와 기악과 선생들이 교무실에 모였다.

그 자리에는 가요과의 소문난 꼬마가수인 일곱 살짜리 하춘화와 기악과의 여덟 살짜리 남자 기타리스트 김영환,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 정선이 호출됐다.

이른바 학원의 ‘3대 영재’였다. 학원에서는 이들을 묶어 삼남매 그룹을 결성했다. 말은 발 없이 천리를 가는 법. 소문을 들은 시내 극장쇼 단장들이 뛰어왔다. 3남매 팀의 첫 무대는 당대 최고의 무대 시공관으로 결정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공연 당일 악기를 연주하는 두 아이가 나오지 않았던 것. 팀 출연은 무산됐지만 솔로로 무대에 선 하춘화의 앙증스럽게 노래하는 모습에 객석은 뒤집어졌다.

하춘화의 부친 하종호씨는 “함께 출연했던 전옥 선생이 너무 귀엽다며 춘화의 팔을 물어버리는 일까지 생겨났다”고 회고한다. 하춘화의 성공적 데뷔 소식에 삼남매 팀의 공연이 다시 잡혔다.

이번에는 서울 종로4가의 천일극장 쇼무대. 이때가 1961년 11월, 시내 곳곳에 포스터가 나붙자 극장 2층부터 성북동 가는 전차길까지 길게 늘어선 관객은 장사진을 이뤄 종로통까지 북적거렸다. 당시는 TV가 없던 시절이었다. 소문에 민감한 KBS에서 공연 후 아이들을 지프에 싣고 가 라디오 생방송을 내보냈고, 온 나라는 처음으로 어린이가수 열풍에 후끈 달아올랐다.

“저는 금년에 일곱 살 된 하춘화입니다. ”

공연 후 마침내 음반 취입 기회가 왔다. 작곡가 형석기 씨는 “여섯 살 어린 나이에 독집 음반을 내는 가수가 된다는 것은 가요사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1961년 12월3일. 하춘화는 <대구역 떠나는 완행열차> 등 8곡을 담은 10인치 LP ‘하춘화 가요앨범’을 녹음해 1962년 초 1,000장을 발매했다.

동시녹음 시대여서 취입이 쉽지 않았지만 그는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저는 금년에 일곱 살 된 하춘화 입니다”라는 긴 인사말 대사까지 청승맞게 잘해냈다. 사실 그 이전에도 윤복희·송영란 등 어린이가수가 있었지만 독집 앨범 발표는 가요사상 최초의 파격적 사건이었다. 이후 ‘하춘화와 삼남매 쇼’는 전국을 누볐다.

가는 곳마다 ‘천재 꼬마들’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소문을 듣고 몰려온 인파로 극장의 유리창이 깨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1963년 삼남매는 일본에까지 소문나 흥행사에서 교섭이 들어왔다. 하지만 악기 연주 아이들 부모들의 대립으로 교섭이 깨졌다. 이들은 이후에도 부모의 의견대립으로 멤버 교체의 내홍을 겪으며 1964년까지 활동했다.

1965년 2월3일 MBC 라디오의 <가요 1번지> 방송은 어린이가수에 대한 당시의 보수적 사회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진행 아나운서가 “어린아이까지 노래를 시키다니 한심한 세상”이라고 비꼬았다. 당시 어린이가수의 등장은 큰 화제와 더불어 사회적 비판여론도 동반했던 것. 그래서 하춘화는 데뷔 10년 만에야 MBC TV <쇼 반세기> 무대에 출연하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TV 출연 후 하춘화는 박재란·송민도·이미자 등 당시 최고 인기 가수들과도 함께 공연길에 올랐다. 이미자는 공연장 이동 때마다 잠든 그를 업고 다녔을 만큼 엄마 같았던 선배가수다. 하춘화는 반세기 음악인생 동안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이력이 있다.

첫 번째는 1965년 지방공연 중 삼천포의 한 여관에서 이미자와 함께 연탄가스에 중독된 사건이고, 두 번째는 1977년 11월 이리역 대폭발참사사건 때 인근에 위치한 삼남극장 분장실에서 쉬고 있다 극장이 붕괴되는 바람에 목숨을 잃을 뻔했던 사고다. 당시 코미디언 이주일의 도움으로 살아난 일화는 유명하다.

민요풍의 <잘했군 잘했어>는 그의 출세작이다. 놀랍게도 “영감”, “왜 불러”로 이어지는 대화식 노랫말은 신유행어가 되며 발매 6개월 만에 15만 장의 ‘대박’이 터졌다. 하춘화는 팬레터가 하루평균 500여 통이 답지하는 최고의 인기가수로 떠올랐다. 그의 나이 열여섯 살 때의 일이다. 하춘화는 리사이틀의 여왕으로도 불린다.

1991년 5월26일 1,260회의 개인공연을 돌파해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되는 영광의 주인공이 됐다. 기록의 시작은 데뷔 13년이 된 1974년 5월 아세아극장에서 열린 첫 개인 리사이틀. 사상 유례가 없는 3만 명의 인파가 몰려 청계천 일대는 온통 북새통을 이뤘다. 당시 언론은 ‘불경기 속의 기적’이라고 했다.

그해 TBC 방송가요대상 여자가수상 3연패와 더불어 MBC <10대가수가요제>에서 ‘가수왕’에 등극했다. 하춘화의 영광 뒤에는 숨은 공로자가 있다. 부친 하종오 씨다. 1980년 컬러TV 도입 때까지 그의 그림자 역할을 하며 대 스타로 키워낸 아버지 하종오 씨는 하춘화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그가 하춘화의 데뷔 때부터 현재까지 모아온 자료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권당 1,000쪽에 가까운 스크랩북만 20여 권이 넘는다. 그 동안 활동해온 방송·영화 동영상도 DVD로만 90여 개, 모두 1,800시간의 엄청난 분량이다. 하종오 씨의 말이다. “처녀 시절 방송국 주변에서 저 때문에 하춘화는 연애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으니까요. 앞으로 춘화의 어린이가수 시절부터 모아 놓은 이들 자료로 하춘화전시관을 꼭 세우고 싶습니다.”

2006년 성균관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아 주목받았던 최초의 어린이가수 하춘화. 그는 지금도 1,500회가 넘는 경이적 공연기록을 이어가며 왕성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어른들의 눈물 쏙 빼는 어린이가수

만 여섯 살의 나이에 제작된 하춘화의 데뷔 음반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기념비적인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최초의 어린이가수의 독집이었기 때문. 독집에 대한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았던 당시 국내 대중가요계에서 이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실물은 구경조차 어려운 진귀한 하춘화의 첫 독집 ‘하춘화 가요앨범’은 국내 최초의 어린이가수 독집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지금은 수백 만 원을 호가하는 명반으로 통한다. 10인치 LP인 이 앨범은 1961년 12월 녹음을 끝내고 1962년 초에 1,000장을 발매했다.

첫 트랙은 <효녀 심청 되오리다>. 음반에 바늘을 올리면 “저는 금년에 일곱 살 된 하춘화 입니다”라는 당시 육성이 담긴 앙증맞은 인사말이 흘러나와 포복절도하게 한다. <대구역 떠난 완행열차>는 특별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선풍적이었던 ‘하춘화와 삼남매 쇼’에 대한 소문을 들은 공주형무소의 간청으로 500여 명의 죄수가 모인 강당에서 하춘화는 청승맞게 이 노래의 대사를 읊었다.

순간 장내는 눈물바다로 변해 공연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춘화에 이어 대중이 기억할 만한 어린이가수는 1964년 일곱 살에 데뷔한 오은주와 <검은 고양이 네로>로 유명한 1970년대의 박혜령이 있다. 1966년 팝과 로큰롤을 번안해 놀라운 가창력을 선보였던 박활란도 있다.

미군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미8군 출신 어린이가수인 박활란은 2장의 독집을 발표한 숨은 보석 같은 존재다. 당시 미8군에는 인기 절정이었던 어린이가수가 제법 있었다. 윤복희와 송영란으로 구성된 어린이 듀엣 ‘투 스쿼럴즈(다람쥐 두 마리)’도 국내 어린이가수 역사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팀이다.

1960년대 초반부터 활동을 시작했지만 1970년대에 음반을 발표한 나미도 어린이가수 출신이다. 나미는 영화 <엘리지의 여왕>에서 이미자의 어린 시절을, 영화 <미니 아가씨>에서 윤복희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아역배우이기도 했다. 나미는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춤과 노래실력 덕분에 동두천지역 미8군 병사들의 꼬마영웅이었고, 1960년대 극장쇼 무대의 슈퍼스타였다.

짧은 섬광 같았지만 1970년대 들어 2년 정도 국내에 어린이가수 열풍이 분 적이 있다. 1970년 이탈리아 동요 <검은 고양이 네로>를 번안해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여섯 살짜리 박혜령을 필두로 최은형·윤선미·강미경 등은 어린이가수 열풍을 일본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에까지 파급시킨 주역들이다. 1971년에는 국내 최연소로 기록된 세 살짜리 가수도 등장했다. 강남주다.

최근 한 지상파 TV 프로그램에서는 강남주의 존재를 놓고 ‘있다 없다’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어린이가수 열풍은 1977년 패밀리 그룹 ‘작은별가족’의 강인봉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동안 주춤했다. 그 동안 최연소 음반 취입 기록 역시 하춘화의 몫으로 당연시되어왔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71년 가요 음반 <아빠와 엄마>를 취입한 세 살짜리 강남주에 의해 깨졌다. 하지만 강남주의 음반은 독집이 아닌 옴니버스 앨범이어서 최연소 독집 앨범 취입 기록은 여전히 하춘화 몫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최초로 음반을 발표한 어린이가수는 하춘화가 아닌 윤복희의 차지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1950년대 중반 열 살의 윤복희는 이미 손목인의 곡 <보고 싶은 엄마> 취입녹음을 했기 때문. 하지만 전례 없던 어린이가수의 음반에 대한 상업적 불안감을 느낀 레코드사는 인기가수 송민도에게 재녹음시켰다. 그 바람에 한국 최초의 어린이가수 음반은 1961년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윤복희는 열네 살 때 소녀 듀엣 <투 스쿼럴스>로 활약한 8군 무대의 인기 스타였다. 1963년 워커힐극장 개관 무대에 특별 초청된 루이 암스트롱 앞에서 기막힌 모창 실력을 뽐낸 그의 재능은 지금도 회자하는 대중가요사적 모멘트였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전 <한국일보> 기자이자 프로 사진가. 7080 음악열풍을 주도한 공연기획자.

희귀 음반을 비롯한 대중문화자료 수집가. KBS·SBS·CBS·교통방송 등에서 음악프로그램 진행.

현재 대학에 출강하는 한편, 각종 신문·잡지·사보에 대중문화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글·사진■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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