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블랙홀, 커피④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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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블랙홀, 커피④
클래식 선율 타고 흐르는 에스프레소 향기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아무 일 도 하지 못하는 '커피 홀릭'이다. 더 정확 히 말하면 ‘에스프레소 홀릭’이다.심리 적인 요인인지도 모르지만 아침에 에스 프레소를 마시지 않고는 머리가 맑아지 지 않는다. 아침을 함께한 에스프레소 향 기는 늦은 밤까지 하루 종일을 곁에서 떠 나지 않는다. 늦은 밤엔 불면증을 걱정하 기도 하지만 결국 그 향에 이끌려 잔을 입에 대고 만다. 그리곤 잠들지 못하는 긴긴 밤 그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또 밤 새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괴짜 같은 에스 프레소 홀릭이다. 에스프레소에 빠지게 된 사연은 5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스페인 바르셀 로나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친구가 있었 는데, 친구의 집은 언제나 건물 전체에 향긋한 에스프레소 향기가 넘쳐났다.

이 유는 바로 아래층에 위치한 카페 때문.친구의 말로는 유럽의 카페는 이웃들이 모여 소식을 주고받고 정을 쌓는 마을회 관 같은 곳이라고 했다.향긋한 에스프레소 한잔과 사람의 정 을 느낄 수 있는 그 곳의 카페가 내겐 너무 새로운 경험이었다.머무는 동안 친구와 나는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몇 잔씩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보내곤 했다.
 
서울에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한 이후 에도 종종 그 특별한 향기가 그리워지곤 했다.그때마다 친구를 핑계 삼아 바르셀 로나행 비행기에 몇 차례 더 오르곤했다.친구는 이사를 할 때 마다 새로운 마을의 카페를 탐험해 보지 않겠냐며 연락을 해 온다.그러면 나는 또 쪼르르~ 짐을 싸서 바르셀로나로 날아간다.그때부터였을까? 향이 진한 에스프레소를 마시지 않으면 그 어떤 일도 시작할 수 없게 된 것이….
 
유럽의 에스프레소는 달랐다.허름 해 보이는 카페에서 마시는 그 한잔은 그 어떤 커피전문점의 에스프레소보다 향 과 맛이 진했다.카페 주인에게 물어보니 “에스프레소 머신이 오래될수록 기계에 배어있던 커피의 오랜 향이 묻어 나와 그 맛이 더욱 진해진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라디오 방송 시작 전에 에스프레소 한잔은 반드시 거쳐야 할 필 수 코스다.공연 기획에 시간가는 줄 모 르다 밤을 새고 스튜디오에 오면 정신이 몽롱해지기 일쑤인데, 이때 마시는 에스 프레소한잔에 정신이 확 든다. 공연 전에 도 마찬가지다.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공 연 전 에스프레소 한잔은 나에게 있어 나 의 영혼을 깨우는 일종의 ‘숭고한’ 의식 과도 같은 것이다. 한번은 친구의 공연을 관람하러 이탈리아에 간 적이 있었는데, 공연장소가 산 꼭대기에 있는 성당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한잔의 에스프레 소가 간절했던 나는 그 한잔의 의식을 치 르기 위해시내에 있는 카페까지 왕복 1 시간 이상을 걸었던 적도 있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는 커피를 너무 좋 아해서 커피를 위한 곡을 쓰기도 했다. 오페라 ‘커피 칸타타’가 바로 그것.일전 에 미술관에서 열린 공연에서 우연찮게 도 커피 매니어인 내가 해설을 맡아 진행 해 더욱 특별하게 와 닿는 곡이다. 최근에는 수년간 고심하며 기획한 특별 한 공연 덕분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한국전력과 함께하는 ‘희망사랑 나누 기 콘서트’가 바로 그것인데, 현재 전국 67 개 도시를 순회하고 있다. 해설을 곁들인 이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밤을 지새고 있다. 바흐가 그토록 예찬해 마지 않던 커피, 그리고 ‘커피 칸타타’와 함께.

장일범(클래식 음악평론가·KBS1 FM ‘장일범의 생생클래식’ 진행자)

▶자료제공 =KRU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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