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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7> 히노마루 교실과 풍금소리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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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너 학교에 들어갔다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반갑게 인사를 한다. 하루 사이에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누구도 ‘학교’란 말이 무슨 뜻인지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선생님까지도 “쓸데없는 거 알려고 하지 말고 가르치는 거나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씀하신다. 학교는 왜 ‘학교’라 부르고 서당은 왜 ‘서당’이라고 하는지 그 말뜻을 알려고 하는 것이 어째서 쓸데없는 짓이란 말인가. 아니 ‘공부(工夫)’란 말은 또 뭔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도 사람들은 “그런 것 알아서 뭐하느냐” “그게 밥 먹여주느냐”며 비웃는다.

어른들은 중요한 것을 묻지 않는다. 귀찮아서, 겁나서, 몰라서 그냥 피한다. 그것들과 눈만 마주치지 않으면 밥만 먹고도 잘 사는 거다. 감동 없이도, 사랑 없이도, 나라 없이도 말이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나는 인기 없는 아이였다. 매사를 캐묻는 ‘질문대장’ 혹은 말다툼 잘하는 ‘겐카도리(싸움닭)’라는 별명이 붙어 다닌 걸 보면 안다. 하지만 무엇을 물어도 지적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시는 어머니가 계셨다. 어머니는 새 공책 겉장에 내 이름과 ‘온양 명륜 심상 소학교(溫陽明倫尋常小學校)’라고 입춘방을 쓰실 때처럼 한 자 한 자 글씨를 써 가시면서 토를 달아 읽어주신다. 그 가운데서도 ‘배울 학, 가르칠 교(校)’란 말은 분명히 기억할 수가 있었다. 새로 깎은 연필에서는 제사 지낼 때 나는 향불 같은 냄새가 풍겨 왔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타고 이 지식의 향기가 ‘온양’의 따스한 햇볕, ‘명륜’의 밝은 빛 무리에 섞여 내 가슴 안으로 번져 왔다. 아들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를 다녔다는 맹자의 어머니가 아니라도 좋다, 가르침을 위해서 불을 끄고 흰떡을 썰었다는 한석봉 어머니가 없어도 좋을 것이다. 어른들이 아이의 질문에 대해 짜증만 내지 않았어도 식민지 교실은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라인골드의 『스마트 맙스』를 사서 첫 장을 펼쳤을 때 불현듯 쏟아진 내 몇 방울의 눈물은 그 책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색칠그림에 칠을 할 때 그 선을 멋대로 벗어나도 야단치지 않으셨던 어머니에게 이 책을 바친다. 어머니 감사합니다”라고 쓴 그 저자의 헌사를 보고 그때의 연필 향기를 맡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었기에 라인골드는 다른 지식인들처럼 그려준 선 안에서만 생각의 칠을 하지 않고 대담하게 휴대전화를 든 새로운 군중 속으로 나갈 수가 있었다.

모든 학교를 다 졸업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는 ‘학교’란 말이 옛날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영어의 ‘학교(school)’가 고대 희랍어의 ‘스콜레(schole)’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과, ‘논다’의 여가(餘暇)의 뜻과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것도 대학 때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학교’란 말을 토를 달아 읽어주시지 않았더라도 뒤늦게나마 학교란 명칭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았을지 모른다.

한 걸음 더 나가 ‘학교’란 말이 일본 사람이 붙인 이름이 아니라 『맹자』의 ‘등문공장구 상(滕文公章句 上)’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어떠했을까. “다음에는 교육정책이 긴요합니다. 학교(學校)를 만들어 백성을 교육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夏)의 시대에는 ‘교(校)’라 하고 은(殷)나라 때에는 ‘서(序)’라 하고 주(周)나라 때에는 ‘상(庠)’이라 하여 이름은 달랐지만 거기에서 배우는 내용은 모두 같았습니다. 이렇게 위에 서있는 자가 인간의 도를 밝혀 가르쳐 인도하면 백성들은 감화하여 크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지겹도록 들었던 그 ‘공부(工夫)’란 말이 중국에서는 희랍어의 경우처럼 노는 ‘여가’를 의미하고, 일본에서는 ‘생각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안 것도 훨씬 뒤의 일이다. 시간이 여유가 있어야 공부를 할 수 있고, 공부를 해야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다. 같은 한자인데도 한·중·일 뜻이 다 다른 것을 합치면 멋있는 학교교육론이 된다는 것을 어렸을 때 알았더라면 공부하는 태도도 달라졌을는지 모른다.

불행하게도 학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학교의 이름이 바뀐 것은 1940년 학교에 입학하던 그해의 일이다. ‘온양명륜소학교’가 ‘온양국민학교’로 바뀌었던 것이다. 왜 그 명칭이 바뀌었는가. 그것이 나에게, 한국인에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 주었는가.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왜 그들은 국민학교라고 이름을 바꿨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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