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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떨어져도 벚나무는 살아야 한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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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호 35면

누구라도 생로병사의 숙명을 피할 수 없다. 5월의 신록처럼 푸르던 청춘도 백발에 주름 가득한 노인이 되고 만다.

유엔은 인구 중 65세 이상의 노인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Aging Society), 14% 이상이면 ‘고령 사회’(Aged Society), 20% 이상이면 ‘초고령 사회(Post-Aged Society)’로 분류하는데 우리나라는 2000년에 이미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고, 현재는 전체 인구의 10%를 상회하는 500만 명 이상이 노인에 속한다. 2018년에 ‘고령 사회’가 되고, 2026년에 ‘초고령 사회’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베이비붐이 일었던 1955~63년 사이에 태어난 이들이 전체 인구의 14.7%인 714만여 명인데 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노인 세대로 진입하면서 겪게 될 급격한 변화를 우려하는 시각이 많다.

육체적·정신적으로는 건강한 노인들이 일자리를 상실한 상태로 수십 년을 살아가야 하는 고령화 사회에서 은퇴 이후 노인들의 삶을 젊은 세대가 책임지지 못한다면 가난과 질병, 고독에서 비롯된 노인들의 범죄 역시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 조짐은 벌써 나타났다. 노인 범죄자가 2003년 2만7469명에서 2007년 5만820명으로 급격한 증가 추세에 있다. 같은 시기 청소년 범죄는 줄어들었다.

교도소에 수감된 노인 숫자를 보면 더 놀랍다. 98년에 60세 이상 수형자가 574명이었는데 2007년에는 1269명으로 두 배 이상 급증한 것이다. 20세 미만 수형자가 98년 1585명에서 2007년 251명으로 크게 감소한 것과 대비된다.

노인 범죄의 양상이 재산범죄 일변도에서 살인이나 성폭행 등 강력범죄로 다양화하는 것도 걱정거리다. 2007년 9월에 70대 노인이 젊은 연인들을 잇따라 살해한 사건이나 지난해 2월의 숭례문 방화 사건, 60세가 넘은 4인조 할머니 소매치기단 사건에 이어 지난달에는 평균 나이 65세, 최고령자 80세, 70대 후반의 두목이 이끄는 ‘17인조 할아버지 도박 사기단’ 사건 등 갖가지 노인 범죄가 우리를 놀라게 한 바 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노인 범죄에 대한 연구나 대처는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형사정책의 기초자료가 되는 각종 범죄 통계에서 ‘노인 범죄’ 항목은 없다. 교정행정적 측면에서도 천안소년교도소, 청주여자교도소 혹은 외국인 전담 수용시설은 있지만 노인 전용 교도소는 아직 없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노인 범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각종 연구와 대책 수립을 꾸준히 해왔다. 그 결과, 가족들로부터 버림받고 가난에 시달리는 고독한 삶이 노인 범죄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궁핍하고 외로운 사회보다 교도소가 낫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이 적지 않다는 일본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줄 것인가?

일본의 저명한 추리작가 우타노 쇼고(歌野晶午)가 쓴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라는 로맨틱한 제목의 추리소설을 보면 건강하지만 가난해서 범죄의 표적이 되거나 범죄에 빠져드는 일본 노인의 힘든 인생이 절묘한 반전 기법과 시적인 언어로 묘사돼 있다.

“꽃이 떨어진 벚나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건 기껏해야 나뭇잎이 파란 5월까지야. 하지만 그 뒤에도 벚나무는 살아 있어. 지금도 짙은 녹색의 나뭇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지. 그리고 이제 얼마 후엔 단풍이 들지”, “꽃을 보고 싶은 녀석은 꽃을 보며 실컷 떠들면 된다. 인생에는 그런 계절도 있다. 꽃을 보고 싶지 않다면 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지금도 벚나무는 살아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물든 벚나무 이파리는 찬바람이 불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70세의 나이 지긋한 주인공 탐정 나루세가, 노년의 비참한 삶에 좌절해서 끝내 살인까지 불사한 69세 애인 세쓰코의 자살을 만류하고 갱생을 설득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노년의 활기찬 인생을 예찬한 아름다운 비유를 읽으며 ‘이 책, 제목 한 번 제대로 붙였구나’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청춘을 맞아 활짝 핀 벚꽃도 좋지만 꽃이 진 뒤 울긋불긋 단풍 든 벚나무 역시 아름답다는 주장에 공감한다면, 노인들이 사회와 이웃·가족의 외면과 소외에 상처받고 흉한 낙엽처럼 진창에 구르지 않도록 우리 모두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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