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시평

‘순사 방역’ 대 ‘인권 방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큰 공포는 미지(未知)에서 온다. 정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맹수보다 어둠 속에서 눈빛만 보이는 존재가 더 무섭다. 전파 경로와 유전적 특성, 독성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변종 플루에 사람들이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각국은 자국민의 불안감을 잠재우고 괴질 확산을 막기 위해 갖가지 방역 대책을 내놓았다. 흥미롭게도 대응 양상이 나라·대륙마다 차이가 났다.

가장 예민하게 움직인 나라는 중국이었다. 플루 감염자로 확인된 남자가 머물렀던 호텔의 투숙객·종업원을 일주일간 격리하는가 하면 멕시코인들에 대한 검역을 강화했다. 이에 멕시코 대통령이 TV에 등장해 “무지와 잘못된 정보 때문에 일부 국가나 지역에서 차별적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몇 년 전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으로 고생했던 홍콩의 경우 17층 규모의 특수병동까지 세워 의심환자가 발생하면 바로 강제 입원시키고 있다.

일본도 중국 못지 않았다. 남미에서 플루가 유행하자마자 멕시코·미국·캐나다에서 오는 입국자 전원을 강제 검역했다. 교육당국의 수장은 “단 한 명이라도 감염자가 확인되면 전국의 각급 학교에 휴교조치를 내리겠다”고 공표했다. 감염 의심자는 물론 그 주변 승객까지도 공항 주변 숙박시설에 열흘 정도 격리 수용하겠다고도 했다.

반면 미국 정부의 대응 태도는 (우리 기준으로 볼 때) 태평스러웠다. 환자가 1000명이나 확인되는데 멕시코 국경 폐쇄나 항공운항 중단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효과는 적으면서 비용이 많이 들어 실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과잉대응으로 인해 인권침해가 우려된다”고 판단했다. 거의 모든 주로 확산되는데도 지방정부가 자율적으로 휴교령을 내리도록 했다. 유럽 역시 아시아에 비해 ‘착한’ 방역 대책을 쓰고 있다. 독일은 대통령이 나서 “이번 플루는 통제 가능하다. 공포심을 조장해선 안된다”고 언론에 주의를 당부했다.

이번에 보여준 한국의 방역 태도는 중국·일본보다는 미국·유럽에 가깝다. 최초 감염환자(수녀) 대응 방식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당국은 수녀원에 외출금지만 권고하고 강제로 봉쇄·격리하지는 않았다. 일부 수녀들은 자유롭게 미사까지 다녔다. 감염환자가 나왔지만 휴교령을 내리지 않았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움직임에 맞춰 단계적으로 대처했다. A씨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 허술하고 느긋하게 보였을 것이다.

통제냐 관리냐. 세계 각국의 방역시스템은 어느 쪽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통제 우위형은 신속 차단에, 관리 우위형은 실효·인권에 주목한다. 아시아 국가들은 통제를, 서구 선진국은 관리를 택하는 추세다. 9·11 이후 생물학테러에 대비하기 위해 개인의 사생활을 제한하는 긴급보건법을 만들었던 미국은 얼마 전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검역 조항을 개정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는 강력한 통제방역을 경험했다. 역병이 나면 해당 마을을 철저히 격리했다. ‘한센병과 소록도’ 같은 비극도 벌어졌다. 감염력을 따져보지 않고 한센병 환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고도에 가뒀다. 강제노동·불임시술 등 온갖 인권침해를 저질렀다. 의료보다는 사법이 앞선 ‘순사(巡査) 방역’이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일본의 ‘철저한 통제’ 기조는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격리·봉쇄가 항상 효과적이지는 않다. 파리 한 마리를 잡는 데 해머까지 쓸 필요는 없다. 발이 달린 듯 급속히 퍼져나가는 전염병을 방치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전염 양상을 꼼꼼하게 진단해 이에 맞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환경과 개발처럼 역병차단과 인권침해는 동시에 취하기 어렵다. 상황에 따라 양자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방역의 선진화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신종 플루는 우리의 새로운 방역시스템을 테스트했다. 2003년 사스 창궐 이후 만든, 인권·실효를 고려한 틀이다. 정부 대응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플루엔자의 공식 명칭을 몇 번이나 바꿨고 단순 독감 환자를 플루 감염자로 오진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사스·조류인플루엔자나 구제역 때보다는 차분하고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인권침해 논란도 적었다. 평가가 이르기는 하지만 적어도 우리 방역시스템의 가능성은 보여줬다고 하겠다.

이규연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