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비민주 드러낸 민노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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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9일 서울명륜동 유림회관에서 열린 민주노총 제8차 대의원대회는 안팎의 주목을 받은 중요한 자리였다.

노사정 대타협안에 대한 승인 여부가 민주노총은 물론 노사정위원회, 나아가 한국경제의 앞날을 가름하는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6시간에 걸친 마라톤회의 끝에 노사정 합의안 승인은 거부로 결론났고 이에 따라 앞으로 노사정위 운영이나 정리해고 입법과정에서 적잖은 진통이 불가피하게 됐다.

또 교섭권을 위임받은 대표가 노사정위에서 동의한 합의사항이 이날 대의원대회 결정에 따라 효력을 잃을 가능성은 적으나 노사정 대타협에 대한 국민적 성원을 외면했다는 비난과 함께 대외신인도 회복이라는 지상 (至上) 과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게 됐다.

이날 회의는 민주노총에 '정리해고 반대' 라는 의견을 수렴한 반면 '내부분열' 이라는 돌이키기 힘든 상처를 남긴 자리였다.

'최선은 아니지만 불가피한 선택' 이었다는 현실론과 '생존권 보장' 이라는 당위론이 정면충돌한 회의는 찬반토론만 3시간 이상 소요될 만큼 격렬했다.

그러나 회의는 안타깝게도 차가운 이성으로 함께 고민하기보다 시종 극한 (極限) 감정싸움으로 일관했다.

자기 의사에 반대되는 의견이 나오면 여지없이 “야, 이 ××야” “집어치워” 등 욕설이 난무했고 회의 진행을 무시한 끼어들기 발언도 다반사였다.

결국 승인 여부도 비밀.무기명투표가 배제된 채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기립투표로 결정됐다.

'민주' 를 자처하는 민주노총의 최고의결기구인 대의원대회가 철저히 '비민주적' 으로 진행된 것이다.

10년이라는 역사를 갖고 있는 민주노총의 이같은 모습에 참석했던 노동계 원로들도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래서는 안된다” 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왔고 “이대로 투표로 들어가면 조직이 분열되니 밤샘토론을 해서라도 합의를 이루자” 는 의견도 나왔지만 이내 욕설과 고함에 묻히고 말았다.

물론 정리해고나 근로자파견제 등이 조합원들의 '생사' 가 걸린 문제였다는 것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는다.

샐러리맨이라면 누구나 정리해고에 거부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어 민주노총이 제대로 된 반대의사를 결집했다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과정을 무시한 결론은 아무리 올바른 것일지라도 힘을 발휘할 수 없는 법이다.

결국 파행적인 과정을 통해 부결됨으로써 합의 번복이라는 상처를 입었고 55만 조합원, 나아가 1천2백만 근로자들에게 실망감만 안겨 주고 말았다.

박신홍〈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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